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이 1994년 미국의 안전보장을 대가로 핵무기를 포기한 결정을 후회한다고 밝혔다.

22일(현지 시각) 미 폭스뉴스에 출연한 쿨레바 장관은 ‘우크라이나의 핵무장 포기가 실수였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과거를 짚어보고 싶지는 않다.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는 없다”면서도 “미국이 러시아와 함께 우크라이나의 핵무기를 ‘빼앗으려고’ 공조하지 않았더라면 더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우크라이나는 1994년 12월 7일 미국, 영국, 러시아와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세계 3위 규모의 핵무기를 포기했다. 우크라이나는 이후 1800여개의 핵탄두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모두 러시아로 반출해 폐기했고, 1996년 6월 남은 핵무기를 전부 러시아에 넘기면서 비핵화를 완료했다. 당시 미국과 영국은 그 대가로 우크라이나 영토의 안전성과 독립적 주권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쿨레바 장관은 이날 CNN에 출연해서도 과거 우크라이나의 핵포기 결정을 언급하며 “미국은 약속했던대로 자국의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러시아의 구둣발이 우크라이나 땅에서 철수하기 전까지는 어떤 제재도 충분한 역할을 하지 않을 것”이라며 더욱 강력한 대(對)러 제재도 요구했다.

토니 블링컨(오른쪽) 미국 국무장관과 드미트로 쿨레바(왼쪽)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이 22일(현지 시각) 워싱턴DC 국무부 청사에서 회담 직후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블링컨 장관은 이 자리에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시작했다는 판단에 따라 오는 24일에 예정됐던 미·러 외교장관 회담을 취소한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우크라이나의 핵포기 정책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수차례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거론한 사안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 19일 독일 뮌헨안보회의 연설에서도 “(부다페스트 각서를 협의하기 위한) 당사국들 간 회의 개최를 요청한다”며 “이번이 네 번째이자 마지막 제안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당시 그는 “또다시 회의가 소집되지 않거나, 회의를 통해 우크라이나의 안전보장을 위한 구체적인 결정이 내려지지 않으면 우크라이나는 해당 각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1994년의 모든 결정을 의혹에 부칠 것”이라고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의 분리·독립을 승인한 직후 나온 쿨레바 장관의 이날 발언은 일종의 최후통첩으로 풀이됐다. 미국 등이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지금의 위기를 해결하지 않으면 우크라이나에게는 ‘독자적 핵무장’이란 선택지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 시점에서 우크라이나의 핵무장은 비현실적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부다페스트 각서가 무효화된다 하더라도 러시아가 순순히 핵무기를 되돌려 줄 리 없고, 미국을 비롯한 서방도 비확산 체제를 흔들 우크라이나의 핵무장을 용납하지 않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알렉산드르 투르치노프 우크라이나 국가안보국방위원장은 2018년 “핵무장 포기는 우리의 역사적 실수였다”며 “현대 세계에서 약자의 견해는 존중되지 않는다”고 한탄한 바 있다. 당시 그는 “핵무기를 건네 받은 러시아는 우리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고, 우리의 주권과 안전보장을 보증한 다른 국가들은 우려만 표시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국제사회가 우크라이나의 사례로 동요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우크라이나가 핵무장을 포기한 결과로 러시아의 침공을 받게 되면 국제사회가 이란, 북한 등과 벌이고 있는 핵 협상이 명분을 잃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올렉시 다닐로프 우크라이나 국가안보·국방위원회 위원장은 18일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와의 인터뷰에서 이 점을 들어 “대통령과 총리의 서명은 가치가 없는 것인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라고 반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