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러시아 군의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 진입 사태를 ‘침공(invasion)’으로 정정해 규정했다고 CNN 등 주요 외신이 22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전날 백악관이 해당 지역은 8년 간 러시아군이 주둔한 곳이라며 “추가적 움직임(new step)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은 지 하루 만이다. 그러면서도 외교 해법을 통한 위기 완화 가능성은 열어뒀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21일(현지 시각)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의 친(親)러시아 분리주의 공화국들에 대한 독립 승인 관련 긴급 국가안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오후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러시아 대응 방침을 담은 대국민 연설을 했다.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전날 친(親)러시아 분리주의자들이 자체적으로 수립한 도네츠크인민공화국(DNR)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LNR)의 독립을 승인하고 ‘평화 유지’를 명목으로 파병 결정을 내린 데 대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공을 시작한 것”이라며 경제적 제재 방침을 공개했다.

미국이 러시아의 조치를 ‘침공’으로 정정하면서 오는 24일 열릴 예정이었던 미·러 외교장관 회담과 그 후에 예정된 정상회담도 취소됐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이날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무장관과 회담을 마친 뒤 “러시아의 행동은 외교를 전면 부정한 것”이라며 회담 결렬을 선언했다. 다만 바이든은 “미국과 우리의 동맹은 전면전 등 심각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와) 대화의 여지를 계속 열어두겠다”고 했다.

친(親) 러시아 반군 조직의 대피령에 피란길에 오른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주민 가운데 한 어린이가 22일(현지 시각) 러시아 서남부 로스토프주의 타간로크에 있는 기차역에 도착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탄 차 안에서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이고 있다. /타스 연합뉴스

◇러시아어·루블화 사용...주민 절반 “자치 및 러시아로 통합 선호”

국제법 일반 원칙상 러시아의 이번 조치는 우크라이나 영토와 주권에 대한 침해 행위에 해당한다. 블링컨 장관도 전날 “우크라이나 주권에 대한 명백한 공격(clear attack)”이라고 했다. 그러나 ‘침공’ 자체로 러시아가 취할 만한 영토상의 효과는 거의 없다는 게 중론이다. 국제사회가 러시아와 접한 이 곳을 공공연히 ‘분쟁 지역’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백악관이 전날까지 ‘침공’ 규정을 보류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러시아는 2014년 3월 크림반도를 강제병합한 이후 돈바스 지역 내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당시 친러시아 세력이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며 DPR과 LPR을 자체적으로 수립했고, 우크라이나 정부군과의 내전을 벌였다. 이듬해 독일과 프랑스, 러시아, 우크라이나가 ‘민스크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친러 지역의 자치권을 보장키로 했다. 이를 전제로 휴전을 약속했지만 이후 8년 째 산발적 교전은 계속되고 있다.

수도 키예프 등 서부와 달리 동부 돈바스는 문화적으로도 친러 성향이 강하다. 일단 공식 언어가 러시아어다. 우크라이나의 통화인 흐리브나 대신 러시아 루블화를 사용한다. 400만 명 수준인 돈바스 인구의 30% 이상이 러시아 여권을 소지한 러시아인이다. 우크라이나 전체 인구 대비 러시아인 비율(17.3%)의 두 배에 가깝다.

러시아 비영리 독립 여론조사기관인 레바다 센터(Levada Center)가 지난해 돈바스 거주민 16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루간스크와 도네츠크를 독립국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응답이 28%로 1위를 기록했다. 러시아에 통합되기를 바란다는 응답도 25%로 뒤를 이었다. 우크라이나에 반환해야 한다는 응답은 10% 미만이었다.

독일 북동부 도시 루브민의 '노르트 스트림-2' 부설공사 현장의 가스관.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22일(현지 시각)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러시아와 독일 간 천연가스관 연결사업인 노르트 스트림-2를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AFP 연합뉴스

◇'리더십 회복’ 간절한 美는 외교해법 고심....주판알 튕기는 유럽

바이든 행정부의 애매한 태도는 미국의 딜레마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현 사태를 침공으로 규정하면 러시아와 외교적 타협 여지가 줄어들 우려가 있다. 동시에 보수 진영으로부터 ‘침공이라는 표현을 회피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실제 피해 당사자인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도 전날 TV 연설에서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영토 보전에 대한 침해”라고 표현할 뿐 침공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았다.

이러한 혼란 속에 푸틴은 반사 이익을 챙기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적했다. 유럽 각국이 러시아와 경제적으로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서방의 단일대오에 균열이 생겼다는 것이다. WSJ은 “미국은 대서양 연안 동맹이 계속 주장하는 통합과 결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분명한 균열을 이미 알고 있다”며 푸틴 본인도 이러한 혼란 속에 ‘침략의 대가’를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외교 전문가를 자처한 바이든은 아프가니스탄 철군 사태 이후 가장 어려운 시험대에 올랐다. 전면전 대신 외교적 해결책으로 지정학적 위기를 잠재우면서도 미국의 위상을 회복해야 한다. 그는 이미 지난해 아프간 주둔 미군을 일방적으로 철수했다가 국제사회에 큰 혼란을 야기하며 미국의 리더십을 훼손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방 각국의 이해관계도 제각각이다. 유럽 천연가스 공급망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WSJ은 “모스크바 천연가스 최대 고객인 이탈리아의 마리오 드라기 총리는 러시아에 등을 돌려 자신의 정치적 유산이 에너지 위기로 퇴색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 이탈리아는 최근 러시아 에너지업체 로스네프트와 가스 계약을 맺은 데 이어 정상회담을 계획하는 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로부터 천연가스의 40%를 들여오는 독일도 같은 처지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이날 러시아군 진입 사태에 대응해 러시아와 독일을 연결하는 가스관 노르트 스트림-2의 승인 절차를 일시적으로 중단했다. 그러나 해당 가스관이 아직 가동 전인 데다 승인에 필요한 검토 작업을 임시 중단한 수준이라는 점에서 ‘폐쇄’와는 결이 다르다고 독일 공영 도이체벨레(DW)는 전했다.

WSJ은 바이든 행정부가 검토했던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 퇴출도 현실화하기 어렵다며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네덜란드에서 러시아 채권단에 대한 수백억 달러의 지급이 차질을 빚을 수 있어 이미 배제된 카드”라고 했다. 영국 BBC도 런던 은행과 부동산 내 러시아 자금이 차지하는 규모가 너무 크다며 “이미 ‘런던그라드(런던과 ‘마을’이라는 슬라브어의 합성어)’가 돼버렸고, 제재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