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부가 은행을 포함한 금융기관에 대해 대대적인 조사에 나섰다. 올 들어 정보기술(IT) 기업과 사교육 업체, 부동산 시장 등을 겨눴던 규제의 ‘칼날’이 이번에는 금융권으로 향한 것이다.

중국 상하이의 국제수입박람회 건물 앞에 공상은행 광고가 걸려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1일(현지시각) 시진핑 국가주석의 지시로 중국 당국이 지난달부터 국영은행을 포함한 중국 금융기관들과 민간기업들의 유착 관계에 대한 집중 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전했다. 이번 조사는 금융권과 기업의 결탁으로 중국 내부에 만연한 자본주의를 뿌리뽑겠다는 목적에서 진행됐다.

이번 조사는 중국의 최고 반(反)부패 감사 기관인 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CCDI)가 맡았다. CCDI는 25개 금융기관의 사무실을 수색해 대출과 투자 기록, 규제 관련 문서 등을 들여다 보고 민간기업과 관련된 특정 거래와 의사결정 과정 등에 대한 답변을 요구했다.

은행들과 유착 관계가 포착된 기업들로는 최근 파산 위기에 봉착한 중국 최대 부동산 개발업체인 헝다그룹과 지난 6월 뉴욕 증시에 상장했다 중국 정부로부터 ‘된서리’를 맞은 차량공유업체 디디추싱, 알리바바 계열의 핀테크기업인 앤트그룹 등이 거론됐다.

이번 조사 대상에 포함된 중국 중신은행은 최근 몇 년간 중국 정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헝다에 총 100억달러(약 12조원) 이상을 대출해 준 것으로 조사됐다. 중국 4대 은행 중 한 곳인 농업은행과 광대은행 등도 헝다에 거액을 빌려준 과정에 대해 집중 조사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정부의 ‘철퇴’를 맞게 된 곳은 비단 은행 뿐이 아니다. 중국 국부펀드인 중국투자공사(CIC)는 앤트그룹과 디디추싱에 자금을 댄 것을 문제가 돼 조사 대상에 포함됐다. 중국생명보험 역시 앤트와 디디추싱에 투자해 역시 조사를 받게 됐다.

WSJ는 조사에서 부적절한 거래에 연루된 것으로 드러난 담당자들은 공산당에 의해 정식 조사를 받고, 범법 행위 여부에 따라 기소될 것이라고 전했다. 또 해당 기관 역시 무거운 징계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각에서는 이번 조사가 중국의 금융 부문을 쥐고 흔들었던 왕치산 국가부주석의 세력 약화와도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왕치산 중국 국가부주석. WSJ는 중국 정부의 금융기관 조사가 왕치산 부주석의 세력 약화와 연관이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로이터 연합뉴스

한때 시 주석의 심복으로 꼽혔던 왕 부주석은 여러 국책 금융기관들과 은행에 자신의 측근들을 기용해 금융 부문에서 영향력을 과시했다. 이에 힘입어 그가 한창 위세를 떨치던 당시 중국 금융기관들은 정부의 규제와 단속을 벗어났고, 민간 기업들에게 대출과 투자를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4월 왕 부주석의 측근으로 꼽히는 둥훙 CCDI 수석 검사관이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고 공산당에서 출당 조치되자, 왕 부주석의 정치적 입지도 크게 약화됐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여러 경제 전문가들은 금융권을 향한 중국 정부의 규제와 단속이 최근 위축되고 있는 경기에 찬물을 뿌리게 될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정부의 단속을 우려한 은행들이 대출을 줄이게 되면서 기업들의 투자가 위축되고 소비와 내수 경기도 얼어붙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마이클 페티스 베이징대 교수는 “불확실성이 늘어날 때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던 일을 멈추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쁜’ 대출이 없다면 성장 목표도 이룰 수 없다”며 “규제를 우려한 기술 대기업부터 대출이 끊긴 개발업자들에 이르기까지 민간 부문의 경제 활동 둔화는 정부에 딜레마를 안겨줄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