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전쟁에 따른 유조선 품귀 현상으로 조선업계가 호황을 누리고 있다. 일부 조선업체는 계약이 취소된 유조선을 다른 곳에 고가에 팔아 수익을 더하기도 하는 상황이다. 호르무즈 해협 통항이 막히면서 우회 항로가 늘고 원유 공급망이 재편되자 당장 운항 가능한 유조선의 몸값이 치솟은 영향이다.
◇당장 띄울 배가 없다… 유조선 몸값 급등
6일 영국 조선해운 시황 분석 업체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5월 첫째주 수에즈막스급 중고 유조선 가격은 9200만달러(약 1350억원)로, 일주일 전보다 400만달러(약 59억원) 올랐다. 수에즈막스는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최대 크기의 선박으로, 통상 원유 약 100만배럴을 실어 나른다.
즉시 운항할 수 있는 선박을 찾는 수요가 몰리면서 5년 선령 수에즈막스 중고선가가 9270만달러(약 1360억원)까지 올라 신조선가 8880만달러(약 1300억원)를 웃도는 상황이다. 중고선가가 새로 짓는 선박 가격을 넘어선 이례적인 상황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유조선 품귀 현상은 지정학적 리스크와 노후선 교체 수요가 겹친 결과다. 중동발 원유 공급 불안으로 주요 수입국들이 북미 등으로 공급선을 넓히면서 운송 거리가 길어졌고, 같은 물량을 실어 나르는 데 필요한 선박도 늘었다.
미국이 이란산 원유를 우회 운송하는 이른바 '그림자 선단'에 대한 제재를 강화한 점도 선박 부족을 키웠다. 제재 위험이 없는 선박을 찾는 원유 구매자가 늘면서 정상 운항이 가능한 유조선 수요가 커진 것이다. 여기에 전체 유조선의 46%, 수에즈막스의 40%가 15년 이상 된 노후 선박이라 교체 발주 수요도 이어지고 있다.
유조선 강세 덕분에 삼성중공업은 자칫 악성 재고로 남을 뻔한 취소 선박을 고가에 매각하며 전화위복의 기회를 잡았다. 삼성중공업은 2023년 6월 오세아니아 선주와 척당 8613만달러(당시 환율 기준 약 1138억원)에 건조 계약을 맺고 올 2월까지 인도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선주 측이 최종 분할금을 미납하면서 삼성중공업은 올해 2월과 3월 순차적으로 계약을 해지했다.
골칫거리가 될 뻔했던 이 선박들은 유조선 몸값이 뛰면서 단숨에 리세일(재매각) 시장의 인기 매물이 됐다. 삼성중공업이 매물로 내놓자 호가는 척당 1억2000만달러(약 1760억원)까지 뛰었고, 실제 매각도 척당 1억~1억2000만달러(약 1470억~1760억원) 안팎에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기존 계약가와 비교하면 척당 최소 1300만달러(약 190억원) 높은 가격에 팔린 셈이다.
배값이 단기간에 가파르게 치솟자 기존 발주 선주 측은 지난 4월 창원지방법원에 선박처분금지 및 점유이전금지 가처분을 신청하며 반발했다. 하지만 삼성중공업 측은 "계약상 해지 이후 선박은 삼성중공업이 수취한다는 명확한 조항이 있어 리세일엔 문제가 없다"고 일축했다. 업계에서는 삼성중공업이 법적 분쟁으로 일부 보상 비용을 치르더라도 재매각으로 얻은 차익이 커 이익을 남길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유조선 수주 이어가는 K조선… 선종 다변화 승부수
한화오션은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수주를 늘리고 있다. VLCC는 한 번에 원유 200만배럴을 나를 수 있어 중동 전쟁 이후 몸값이 가파르게 오른 선종이다. 한화오션은 올해 들어 현재까지 VLCC 10척을 수주해, 작년 같은 기간 2척보다 수주 규모를 5배 늘렸다. 한화오션은 지난달 말 실적 콘퍼런스콜에서 "LNG 운반선과 VLCC 등 대형 선종이 올해 매출을 견인할 것"이라며 "VLCC 시장은 지정학적 리스크와 공급망 다변화, 노후선 교체 수요가 맞물리며 신조 수요가 이어질 전망"이라고 말했다.
중형 조선사인 대한조선도 유조선 호황의 수혜를 톡톡히 입고 있다. 올해 4월까지 전 세계 수에즈막스 발주 물량 약 50척 중 13척을 따내며 점유율 26%로 세계 1위를 기록했다. 지난 4월에는 9150만달러(약 1340억원)에 수에즈막스를 수주하며 최고가 기록도 새로 썼다. 1분기에만 11억달러(약 1조6170억원)를 수주해 연간 목표를 조기 달성했고, 4월 기준 34척·32억달러(약 4조7000억원) 규모의 수주 잔고를 확보해 3년 6개월 치 일감을 채웠다.
두둑한 일감을 바탕으로 선종 다변화 승부수도 띄웠다. 대한조선은 지난달 말 실적 콘퍼런스콜에서 "올해 안정적으로 달성할 것으로 예상되는 26% 수준의 영업이익률을 2029년까지 유지하는 것이 목표"라며 "고선가 선별 수주를 추진하는 동시에 수요 확대가 예상되는 초대형 LPG 운반선(VLGC)도 전략적으로 설계 중"이라고 밝혔다. 대한조선은 상반기 안에 VLGC 기본 모델 설계를 마치고, 하반기부터 본격적인 영업에 나설 계획이다. 유조선 호황으로 확보한 수익을 바탕으로 가스선 시장까지 진출하겠다는 전략이다.
유조선 시장의 강세는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수에즈막스 평균 신조선가는 현재 9000만달러(약 1320억원) 수준으로 2008년 고점(1억달러·약 1470억원) 대비 추가 상승 여지가 남아 있다"며 "당분간 중동 리스크와 노후선 교체 수요, 조선소 슬롯 부족 현상이 맞물려 국내 조선사들의 고선가 선별 수주 흐름이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