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사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음에도 한국의 원유 수급 사정이 나아지면서 정유업계와 석유화학업계가 한숨을 돌리고 있다. 그러나 기존에 수입하던 중동산 원유 상당수가 미국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중심으로 대체되면서 항공업계 등에서는 비상등이 켜졌다. 항공유 공급 차질이 장기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동산 원유는 중질유이지만, WTI는 경질유라 뽑아낼 수 있는 석유제품에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경질유보다 중질유에서 항공유와 경유가 더 많이 생산된다.
27일 정부에 따르면 오는 5월 한국 원유 도입량은 지난해 월평균의 87%까지 확대될 전망이다. 4월 도입 물량이 과거의 57%에 불과해 경제에 비상이 걸렸지만, 대체 도입선 발굴로 도입량을 상당 부분 회복한 것이다.
정부와 정유업계는 주로 미주, 아프리카 등에서 물량을 추가 확보했다. 그 결과 중동산 의존도는 69%에서 56%로 13%P 낮아졌다. 정유업계에 따르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 정유업체는 중동 사태 이후 중동산 대신 미국산 WTI, 카자흐스탄 CPC 블렌드(Blend), 서아프리카산 저유황 원유 등을 중동산 원유를 대신해 수입하고 있다.
원유 도입에는 한 시름을 놨지만, 항공업계 등에서는 도입하는 원유가 바뀌는 것이 복병으로 떠올랐다. 하나증권에 따르면 4월 선적 기준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 경질·저유황 원유 비중은 21%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며 2월(11%)보다 10%포인트(p) 상승했다.
경질유 비중이 커지면 경유와 항공유 생산량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중동산에서 뽑아낼 수 있는 등유·항공유·경유 등 중간 유분의 비중은 60%이지만, WTI는 40%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세계 최대의 항공유 수출국이다. 중동산 원유를 정제하고 나오는 찌꺼기에 해당하는 잔사유(벙커C유) 40~50%를 그냥 버리지 않고 고도화 설비에서 다시 분해한다. 이때 가장 많이 나오는 석유제품이 항공유와 경유다.
미국산 WTI는 경질유라 고도화 설비를 거칠 필요가 적고, 잔사유가 나오는 비중이 작은 대신 휘발유나 나프타 비중이 높다. 로이터 통신은 "아시아 지역 정유사의 원유 수입량이 1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하고 중동 사태로 인해 정유업체들이 경질 원유를 처리해야 함에 따라 4월과 5월 아시아 지역의 정유 처리량이 급감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이로 인해 경유와 항공유 생산량이 하루 최소 100만 배럴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내다봤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면서 한국 정유사에서도 WTI 수입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며 "여기에 경유 가격이 지난해 연말부터 계절적 수요 증가를 이유로 상승하면서 정유사가 항공유보다 경유를 더 많이 생산하는 경향이 생기기도 했다. 항공유와 경유는 대체 관계로 경유 생산이 증가하면 항공유 생산은 줄어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