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장기간 봉쇄되면서 국내 정유업계가 중동산(産) 원유를 들여오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유사들은 급한 대로 정부에서 비축유를 빌려 버티고 있는데, 향후 비싼 가격에 빌린 기름을 돌려줘야 하는 처지라 현재 눌려 있는 석유 제품 가격이 결국에는 더 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15일 정유업계에 따르면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한 달 넘게 이어지면서 국내 정유 4사(SK이노베이션·에쓰오일·GS칼텍스·HD현대오일뱅크)는 정부에 비축유 스와프를 신청해 임시 물량을 받아 쓰고 있다. 한국이 지난해 수입한 전체 원유 중 중동산은 70%였고, 대부분이 호르무즈 해협을 건너왔는데 중동 사태로 항로가 막힌 탓이다.
비축유 스와프는 원유가 부족해진 정유사가 정부가 보유한 비축유를 빌려 쓰고 나중에 갚는 제도를 말한다. 정유사가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통과가 어려워진 지역 대신 다른 곳에서 대체 원유를 확보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면 정부가 비축해 둔 중동산 원유를 받을 수 있다. 정부 비축유로 우선 석유 제품을 생산하고 나중에 대체 원유가 도착하면 정부에 돌려주는 방식이다.
산업통상부에 따르면 이달 정유사의 비축유 스와프 신청 물량은 1700만 배럴이며, 이 중 838만 배럴은 이미 각 정유사로 이송됐다. 다음 달 스와프 신청 물량은 1500만 배럴로 잠정 집계됐다. 한국석유공사가 직접 관리하는 전략 비축유는 1억 배럴이며, 일부 물량이 스와프 형식으로 각 정유사로 이송된다.
국내 정유사들은 정부 비축유를 빌려 겨우 버티고 있다. 정유 공장은 원유 분리, 정제 공정 등이 연속적으로 이뤄져 24시간 체제로 돌아간다. 한번 가동을 멈추면 재가동에 시간이 걸려 산업 곳곳에 쓰이는 석유 제품 공급에 차질이 생긴다. 이에 정유사들은 원유가 바닥나기 전에 정부 비축유를 빌려서라도 계속 공장을 돌려야 한다.
정유사들이 대체 원유를 들여오기로 한 국가는 총 17개국이다. 정유 4사가 이달 확보한 대체 원유는 4600만 배럴, 5월은 7200만 배럴로 나타났다. 산업통상부는 정유 4사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가장 많은 대체 원유를 확보한 것으로 파악한다. 현물 거래가 활발한 미국산 원유도 대거 구입한 것으로 전해진다.
국내 정유사의 정제 설비는 중질·고황 원유 비율이 높은 중동산 원유에 맞춰 설비를 구축해 왔기에 중동산 원유를 가져오는 게 가장 유리하다. 정부는 비축유 스와프를 설계하며 정유사가 다른 지역에서 원유를 가져오더라도 정부가 보유한 중동산 원유와 교환할 수 있도록 했다.
문제는 비용이다. 중동산 원유 가격 기준인 두바이유 가격이 뛰면서 이달 미국 서부텍사스산원유(WTI), 브렌트유 가격도 배럴당 최고 110달러선까지 치솟았다. 전쟁 프리미엄에 선적 차질이 더해져 실제 거래 가격은 더 비싸다고 한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습한 전날(2월 27일)과 비교하면, 15일 기준 두바이유는 43% 올랐다. 같은 기간 WTI, 브렌트유는 각각 36%, 30% 뛰었다.
정부 비축유에 대한 사후 정산 문제도 남아 있다. 정유사가 중동산 원유 이외 다른 유종을 가져왔을 경우 정부에 기본 대여료 외에 현물가를 적용해 가격 차액을 정산해야 한다. 현재 두바이유 가격은 WTI, 브렌트유보다 높다. 대체 원유가 중동산 원유가 아니라면 향후 정부에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정유업계는 가격이 상승한 원유가 들어오는 만큼 국내 석유 제품 가격 역시 오를 것으로 보고 있다. 한 정유사 관계자는 "각 회사들이 파악 중인 예상 손실액이 계속 늘고 있다"며 "지금은 정부가 석유 최고 가격제로 국내 휘발유·경유 가격을 누르고 있지만, 정유사들이 비축유 상환 비용 등을 반영해 결국 석유 제품 유통 가격을 올릴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