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전쟁 사태로 석유화학 제품의 기초 원료인 나프타(납사) 공급이 막힌 상황에서 사업 재편까지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의 고민이 커지고 있다. 정부가 제시한 석유화학 산업 재편 마감 시한이 임박하면서 아직 최종 사업 재편 계획서를 제출하지 않은 기업들은 막바지 조율에 사활을 걸고 있다.
20일 산업통상부는 여천NCC, 한화솔루션, DL케미칼, 롯데케미칼 등이 참여하는 여수 1호 프로젝트(이하 여수 1호) 사업 재편 계획서 최종안이 제출됐다고 밝혔다.
여수 1호는 대산 1호 프로젝트에 이어 두 번째 정부 지원 대상이 될 전망이다. 앞서 지난해 11월 충남 서산 대산석유화학단지에 있는 롯데케미칼, HD현대오일뱅크, HD현대케미칼 등이 업계에서 처음으로 최종 사업 재편 계획서를 제출했고, 올해 2월 정부로부터 지원 승인을 받았다.
앞서 지난해 8월 정부는 석유화학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국내 전체 NCC 생산 능력(약 1470만톤) 중 18~25%에 달하는 270만~370만톤을 감축하는 목표를 제시했다. 대산 1호에서 110만톤 감축이 확정됐고, 여수 1호에선 138만5000톤 감축이 제시됐다. 다음 타자로 거론되는 울산 산업단지는 신규 생산 설비가 있어 감축량이 가장 적을 전망이다.
대산, 여수 산업단지의 경우 어떤 기업의 NCC 설비를 중단시키는지가 가장 큰 과제였다. '가장 낡고 효율이 떨어지는 설비부터 끄자'는 원칙을 세웠으나, 해당 설비를 가진 기업 입장에선 자산 가치가 아예 없어지는 것과 같아서다. 석유화학 공장은 설비가 오래될수록 효율이 급격히 떨어지고, 유지·보수비도 막대하게 들어간다.
3대 산단 중에선 아직 울산이 최종 사업 재편안을 내지 않았다. 에쓰오일이 최신 설비인 '샤힌 프로젝트'를 짓고 있어 SK지오센트릭, 대한유화 등 구형 설비를 가진 기존 업체들과의 이해관계가 복잡하다. SK지오센트릭, 대한유화 역시 설비 효율화에는 공감하고 있으나, 각자가 내놓은 공장 가치를 산출하는 과정에서 이견이 큰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 중동 사태로 핵심 원료인 나프타 수입이 막힌 점도 구조조정을 어렵게 만드는 요소다. 국내 업체들이 수입하는 나프타 절반 이상이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서 공급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나프타는 '산업의 쌀'로 불리는 에틸렌의 핵심 원료다. 에틸렌은 자동차, 전자, 건설, 섬유, 플라스틱 등 산업계 전반의 중간재 역할을 한다.
당장 가동 중단을 고민하는 상황에서 중장기적 관점에서 사업 재편을 추진해야 하는 셈이다. 이날 업계에 따르면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이 보유한 나프타 재고 분량은 약 2주에 불과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 여천NCC 등 주요 기업들이 원료 부족으로 제품 공급을 할 수 없다며 불가항력(Force Majeure)을 선언했고, 주요 공장 가동률도 60%대로 낮아졌다.
합병을 위한 기업 가치 산정도 복잡해진다. 공장 가동률이 떨어져 수익이 들쭉날쭉해지면, 공장의 몸값을 정하는 게 어려워진다. 경영진도 단기 대응 전략을 마련하는 게 더 급하다. 한 석유업계 관계자는 "중장기 경영 전략보다는 원료선 다변화, 재고 관리, 금융권 대출 연장 등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사업 재편 속도가 더 빨라질 것이란 의견도 있다. 다른 석유업계 관계자는 "유가 상승, 원료 공급 난항으로 수익성이 더 나빠진다면, 노후 설비를 가진 기업 입장에선 가동 중단을 결정할 가능성이 더 크지 않겠느냐"며 "기업 경영에는 좋지 않은 환경이지만 공급 과잉 해소를 촉진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당초 정부는 최종 사업 재편안 제출 시기를 이달 말로 제시했으나, 울산 산단에선 이를 넘길 가능성이 크다. 당국 관계자는 "다른 기업들도 계속 사업 재편 협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중장기적으로 공급 과잉을 해소하는 것과 단기적으로 납사 수급에 어려움이 있는 것을 따로 두고, 각 사안에 대해 신속하게 지원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