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현지시각) 오만 무스카트 앞바다에 유조선이 정박해 있다./로이터연합뉴스

글로벌 해운사들이 공급 과잉 우려가 커진 컨테이너선 대신 유조선(탱커) 발주로 방향을 틀고 있다. 원유 수송 수요 대비 선박이 부족한 상황과 노후선 교체 수요가 맞물리며 탱커 시장이 달아오른 가운데, 중동 전쟁 이후 운임이 급등해 수익이 늘어난 선주들이 신규 선박 확보에 나선 영향이다.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탱커를 대거 수주해 온 중국 조선소의 건조 공간(도크)도 빠르게 차면서 한국 조선사의 선가 협상력이 높아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13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HD현대삼호는 그리스 대형 선사 캐피탈 그룹과 지난해 12월 맺은 컨테이너선 4척 건조 계약을 15만7000DWT(재화중량톤수)급 원유운반선 4척으로 지난 4일 변경했다. 이는 원유를 만재한 상태에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최대 규모의 원유선이다. 납기는 2028년 10월 31일로 한달가량 앞당겨졌다. 4억6600만달러 규모의 컨테이너선 프로젝트가 3억6000만달러 규모의 유조선 프로젝트로 바뀐 것이다.

통상 선박 건조 계약 초기 단계에서는 선주와 조선소 합의에 따라 선종 변경이 가능하다. 다만 변경 수수료를 지급하거나 추가 발주를 약속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 선주에게도 부담이 따른다.

영국 조선해운시황 분석업체 클락슨리서치는 "조선소 역시 선가 인상이나 마진이 높은 친환경 사양 추가 등 유리한 수익 조건을 확보하는 대가로 기존 계약을 유조선으로 바꾸는 요구를 수용하고 있다"며 "최근 탱커 시장 강세로 이런 선종 변경 움직임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유조선과 컨테이너선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롱비치 복합 항만 인근 해상에서 대기하고 있는 모습./로이터연합뉴스

◇탱커 부족·운임 급등에 선주 발주 여력 확대

선주가 비용 부담을 감수하면서 선종을 바꾸는 건 컨테이너선과 유조선의 수급 전망이 엇갈리고 있어서다. 컨테이너선은 이미 대규모 발주가 이뤄지면서 향후 공급 부담이 커진 반면 유조선은 여전히 선대가 부족한 구조다.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컨테이너선 수주잔고는 기존 선대의 34% 수준이다. 현재 운항 중인 선박의 약 3분의 1 규모의 신규 물량이 향후 시장에 추가 투입될 수 있다는 의미다. 반면 유조선 수주 잔고 비율은 17%에 그치고 있다.

중동 전쟁으로 인한 운임 급등도 탱커 시장 강세를 부채질하고 있다. 호르무즈해협이 사실상 봉쇄되면서 통항량이 90% 이상 급감하자 사우디아라비아는 일부 원유를 홍해 연안 항구에서 선적하는 방식으로 수출 경로를 조정했다.

항해 거리가 길어지면서 유조선 운임도 사상 최고치로 치솟았다. 지난주 중동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초대형 원유 운반선(VLCC) 단기 용선 운임은 하루 48만달러를 기록했고, 수에즈막스 선박은 하루 평균 30만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전 세계 해운시장 하루 평균 수익 지수도 역대 최대인 5만3319달러를 기록했다. 유조선 운항 수익 확대로 현금 유동성을 확보한 선주들이 선박을 새로 발주할 여력이 커진 것이다.

강경태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2021년 이후 시작된 상선 사이클에서 탱커 신조 발주 시장이 올해 가장 강하게 성장할 것"이라며 "올해 1월부터 지난 8일까지 전 세계 조선사에 발주된 탱커 신규 물량은 97척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30척의 3배 이상"이라고 말했다.

◇中 조선소 도크 포화… 韓 선가 협상력 높아진다

늘어나는 탱커 발주를 받아줄 조선소 도크도 빠르게 차고 있다. 한국투자증권에 따르면, 올해 발주된 VLCC 47척 전량과 수에즈막스 33척 가운데 약 58%가 중국 조선소로 향했다. 헝리중공업과 뉴타임스조선 등 주요 중국 조선소는 상선 건조 슬롯이 2028년 인도 물량까지 대부분 채워진 상태다.

업계에서는 이런 흐름이 한국 조선업계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 조선소의 도크가 빠르게 포화하는 만큼 선박 인도를 서두르는 선주들 사이에선 한국 조선사의 선가 협상력이 더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빠른 인도가 필요한 탱커 물량은 한국 조선소에 기회가 될 수 있다"며 "운임 강세로 선주들의 자금 여력도 나쁘지 않아 탱커 신조선가도 당분간 높은 수준을 이어갈 것으로 예측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