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석유 최고가격제를 13일 0시부터 시행한 가운데 정유업계는 마진 하락 가능성보다 미국과 이란의 전쟁 장기화로 빚어질 수 있는 원유 수급 차질을 걱정하고 있다. 기름값이 높든 낮든 정제할 수 있는 원유를 수급해야 하는데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된 상태라 지금 상황이 계속된다면, 중동에서 출발해 한국에 도착하는 원유 흐름이 3월 말~4월 초가 되면 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유업계는 정부의 최고가격제에 적극 동참하겠다고 밝혔지만, 정유사가 주유소에 공급할 가격의 상한선 책정 기준을 알 수 없어 마진이 상승할지 하락할지에 대해 현재로선 계산이 어렵다는 입장이다.
산업통상부는 13일 0시를 기해 정유사가 주유소에 공급하는 유류 공급 가격에 상한액을 설정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이후 국내 휘발유값이 1900원을 넘어서자, 1997년 유가 자유화 이후 29년 만에 석유제품 가격에 직접 개입한 것이다.
정부가 발표한 1차 최고 가격은 세후 기준으로 휘발유는 리터(L)당 1724원, 경유는 1713원, 등유는 1320원이다. 정부에 따르면 3월 11일 평균 공급 가격보다 휘발유는 리터당 109원, 경유는 218원, 등유는 408원 저렴하다. 해당 가격은 오는 26일까지 2주 동안 적용된다. 이후 정부는 국제 석유제품 기준 가격이 되는 싱가포르 현물 시장 가격 변동을 반영해 2주마다 최고 가격을 고시한다.
정부가 발표한 최고 가격은 이란 공습 이전인 2월 4주 평균 공급 가격(휘발유 1616,18원, 경유 1545.6원)보다 높고 전쟁 발발 이후인 3월 1주 평균 공급 가격(휘발유 1766.05원, 경유 1809.89원)보다는 낮다. 전쟁 이후 치솟은 판매 가격은 낮추면서도 국제 석유제품 가격 인상분은 일정 부분 반영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다만, 정부는 국제 석유제품 가격 상승률의 기준점이 되는 기간은 공개하지 않았다. 정부는 최고 가격을 2월 넷째 주 정유사의 공급 가격(세전)에 일정 기간의 국제 석유제품 가격 상승률을 곱한 뒤 유류세를 더해 정했다고만 설명했다. 국제 석유제품 가격 상승률 설정 기간에 따라 정유사 입장에선 수출하는 것보다 손해를 볼 수 있다는 불만이 나올 수도 있는 대목이다.
◇ 중동산 원유 확보 못하면, 가격 낮든 높든 팔 물건 없어
정부의 가격 통제가 시작됐음에도 정유업계에선 최고가격제보다 중요한 것은 원유 확보라고 입을 모은다. 마진이 줄어들더라도 원유를 확보하지 못하면 석유제품 자체를 수출 혹은 국내에 판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유 확보에 난항을 겪어 정제 시설을 돌리지 못하면, 다시 공장을 가동할 때 추가 비용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복수의 정유업계 관계자는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해 한국으로 오고 있는 유조선이 있긴 하다"면서도 "전쟁 발발 직후인 2월 28일 이후에는 중동산 원유를 실은 배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기에 원유 수급이 가장 걱정"이라고 말했다.
통상 중동산 원유가 한국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한 달 남짓이다. 이란 공습 일인 2월 28일, 마지막으로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배는 오는 4월 3일 한국에 도착할 예정이다. 중동산 원유 중 95% 이상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해 한국으로 온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3월 말~4월 초가 되면 중동에서 출발해 한국으로 들어오는 유조선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라며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휘발유 가격이 리터당 2000원을 넘어서더라도 넣을 수 있는 기름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상황이 올 수 있다"고 말했다.
더군다나 정유 4사가 국내에 들여오는 원유의 약 70%는 중동산이다. 사우디 아람코가 대주주인 에쓰오일은 원유의 90% 이상을 중동에서 가져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SK에너지와 GS칼텍스의 중동산 원유 비중은 약 70%이며, HD현대오일뱅크는 원유 수입 물량의 약 60%를 중동에서 가져온다.
3월 말 이후에도 정제 시설을 가동하기 위해 가동률을 줄이는 것도 현실적인 대안은 아니다. 국제 석유 제품 가격이 급등한 상황에서 지금 당장 수출 물량을 유지해야 이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석유 시장에서 거래되는 국제 휘발유와 경유 가격은 전쟁 발발 이전인 2월 4주 대비 3월 1주에 각각 28.1%, 50.32% 상승했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원유를 정제해 나오는 석유 제품을 만드는 전 세계 정유업체는 같은 재료로 같은 제품을 만들어 파는 것"이라며 "정유사가 국내에 파는 유류는 전체 매출의 일부일 뿐 수출이 매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3분기 누적 기준 HD현대오일뱅크와 GS칼텍스의 정유사업 부문 수출 비중은 각각 88%, 71%다. SK에너지의 정유사업 수출 비중은 51%, 에쓰오일의 정유사업 수출 비중도 54%로 절반 이상이다.
◇ 정부, 2246만배럴 비축유 방출 준비 중…"민간과의 순서·비율 논의 중"
다만, 중동산 원유 수급 차질이 빚어져도 당분간 버틸 수는 있다. 국내에는 정부 비축 약 1억배럴, 민간 재고 약 9000만배럴 등 총 1억9000만 배럴의 석유 저장분이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 기준으로 208일분이다.
앞서 산업통상부는 지난 11일 긴급 소집된 IEA 이사회에서 32개 회원국이 총 4억배럴 규모의 비축유를 공동 방출하기로 한 결정에 따라 2246만배럴을 방출한다고 발표했다. IEA의 비축유 공동 방출은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공동 방출한 이후 약 4년 만이다. 한국은 당시 두 차례에 걸쳐 총 1165만배럴을 방출했다.
한국석유공사 관계자는 "통상 민간 재고를 먼저 방출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번에 동참하기로 한 공동 방출 규모가 큰 만큼 민간 재고를 먼저 방출할지 정부 비축분을 먼저 방출할지 순서와 비율에 대해 현재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