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배전기기 선두주자인 LS일렉트릭은 최근 미국 빅테크 기업에 납품할 데이터센터용 배전반 등 전력 설비를 선박이 아닌 항공편에 실어 날랐다. 무게가 수백킬로그램(㎏)에서 수톤(t)에 달하는 전력기기는 통상 해상으로 운송하는데, 항공을 이용할 경우 비용이 30% 이상 늘어난다. 수익성 측면에서는 손해이지만 납기를 맞추기 위해 결단을 내린 것이다. LS일렉트릭이 예정에 없던 자비를 들여 공수(空輸)에 나서자, 미국 고객사는 깜짝 놀라며 한국 기업의 진정성에 높은 점수를 줬다고 한다.
3년 전만 해도 미미했던 해외 빅테크와 송전망 운영사 주문이 급증하며 국내 전력기기 3사(HD현대일렉트릭·LS일렉트릭·효성중공업)의 북미 사업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거듭났다. 과거 글로벌 전력망 시장은 지멘스, 슈나이더 등 소수 유럽 강호들이 수십년간 철옹성을 구축해 왔다.
그러나 인공지능(AI) 시대가 열리면서 판이 바뀌었다. 전 세계적인 노후 전력망 교체 수요와 AI 데이터센터 붐이 맞물려 공급 부족이 극심해졌다. 이 틈을 타 급변하는 빅테크의 까다로운 데이터센터 사양에 맞춰 맞춤 제작이 가능하고 납기를 준수하는 한국 기업들이 최적의 파트너로 낙점됐다. 유럽 기업들이 주도하던 하이엔드 공급망의 틈새를 한국 기업들이 독보적인 기술력과 유연성으로 파고든 것이다.
박성준 LS일렉트릭 데이터센터사업개발팀장은 "한국 전력기기 업체가 미국에서 이 정도로 임무 수행에 필수적인 장비들을 공급할 수 있는 기회는 지금까지 없었다"며 "전통적인 유럽 전력기기 강자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한국 업체들의 경쟁력이 올라왔다"고 말했다.
◇ 韓 전력기기 3사, 북미 사업이 역대 최대 실적 견인
11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 전력기기 3사의 지난해 북미 매출과 수주 실적은 일제히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국내 초고압 변압기 점유율 1위인 HD현대일렉트릭은 지난해 4분기 북미 시장에서만 약 5548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4분기 전체 매출(1조1632억원)의 절반에 육박하는 47.7%를 북미에서 거둬들인 것이다. 이는 전년 동기 북미 비중(22.3%) 대비 2배 이상 급증한 수치다.
이 같은 급성장에 대해 황종현 HD현대일렉트릭 재무담당 상무는 지난 6일 4분기 콘퍼런스콜에서 "미 애틀랜타 법인의 재고 납품이 대거 진행되면서 북미 비중이 많이 늘었고, 이에 영업이익률도 27.6%를 기록할 만큼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빅테크와는 5년 후까지의 물량을 협의 중이다. 옥경석 HD현대일렉트릭 전략해외영업담당 상무는 "미국에서 데이터센터를 크게 운영하는 빅테크 기업과 배전 기기 공급에 대해 상당 부분 합의가 됐다"며 "올해부터 2028년까지 배전 기기 쪽에서도 상당한 물량의 수주와 매출이 발생할 것이며 2030년까지도 배전과 초고압을 연계한 수주를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LS일렉트릭은 글로벌 빅테크와의 대규모 계약에 힘입어 지난해 말 수주 잔고가 창사 이래 처음으로 5조원을 돌파했다. 1년 전보다 45% 급증한 규모다. 지난해 신규 수주(약 3조7000억원) 가운데 데이터센터용이 1조원에 달하는데, 이 중 80%가 마이크로소프트(MS) 등 북미 빅테크와 해외 프로젝트에서 나온 것으로 증권가는 분석했다.
현재 LS일렉트릭의 초고압 변압기 물량은 2029년까지 대부분 '솔드 아웃(매진)'됐다. 데이터센터에 들어가는 배전반과 중·저압 변압기 역시 밀려드는 주문을 생산이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효성중공업 역시 북미 시장의 마진 개선 효과를 톡톡히 봤다. 지난해 4분기 중공업(전력기기) 부문 영업이익률은 20.2%를 기록하며 사상 처음으로 '마의 20%' 벽을 깼다. 전체 매출 1조2127억원 중 북미 비중은 37%로 전년 동기 대비 9%포인트 상승했다.
증권가에서는 효성중공업의 북미 생산 법인 하이코(HICO)의 작년 순이익률이 35%를 상회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수주 역시 4분기 신규 수주 1조9658억원 중 북미 비율이 38%로 가장 높았다.
◇ "4시간 내 못 고치면 배상"... 현지 대응력 키우는 전력회사
이들 업체는 폭증하는 해외 수요를 소화하기 위해 현지 생산 능력을 확충하는 데 속도를 내고 있다. 데이터센터 가동이 잠깐이라도 멈추면 천문학적 손실이 뒤따르기 때문에 빅테크 기업들의 유지·보수 계약은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조건이 '4시간 콜아웃(Call-out)' 서비스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엔지니어가 4시간 이내에 현장에 도착해 조치를 취해야 하며, 이를 어길 경우 막대한 페널티를 부과한다. 물리적인 거리가 멀면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이 '골든타임'을 맞출 수 없다. 단순히 제품을 수출하는 것을 넘어, 현지에 생산 거점을 두고 즉각적인 대응 체계를 갖추는 것이 빅테크 수주의 핵심 조건이 된 것이다.
LS일렉트릭은 데이터센터 내부로 들어가는 배전기기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 텍사스주 배스트럽에 4만6000㎡ 규모의 대규모 생산 거점을 짓고 있다. 기존 유타 공장만으로는 밀려드는 빅테크의 주문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회사는 이곳을 데이터센터용 배전반 생산과 AS를 전담하는 핵심 기지로 육성해 북미 시장 장악력을 높일 방침이다.
HD현대일렉트릭은 데이터센터 확대로 부하가 걸린 미국 전력망 시장을 겨냥해 앨라배마 공장의 대응력을 높이고 있다. 옥 상무는 "미국 시장에서 지난 30년간 없었던 765kV급 초고압 송전망 신규 건설 수요가 작년부터 급증하고 있다"며 "늘어나는 고객 요청에 대응하기 위해 울산과 앨라배마 공장 모두에서 생산이 가능하도록 설비를 구축 중"이라고 밝혔다. 효성중공업 역시 765kV 변압기 생산 거점인 미국 멤피스 공장 증설을 통해 생산 능력을 끌어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