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이 미국 정부 측과 함께 추진하는 미 테네시주 제련소 건설이 일단 정상적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미국 정부가 고려아연과 제련소 운영법인의 지분 상당 부분을 확보해 사업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고려아연은 미 정부의 핵심 안보 협의체인 '팍스실리카(Pax Silica)'를 구성하는 핵심 기업으로 등극할 가능성이 커졌다. 다만 영풍·MBK파트너스가 추가적인 법적·제도적 문제 제기를 예고한 만큼 긴장감을 낮추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24일 법조계와 산업계에 따르면 법원이 영풍이 제기한 가처분 신청을 이날 기각하면서 고려아연은 예정대로 오는 26일 유상증자를 진행한다. 220만9716주(2조8500억원)의 신주를 발행해 미 정부와의 합작법인 크루서블 JV가 고려아연 지분 10.59%를 제3자 배정 방식으로 확보하게 된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고려아연 제공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50부(김상훈 부장판사)는 이날 영풍이 고려아연을 상대로 제기한 제3자 배정 유상증자 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상법 제416조는 신주 발행에 대해 원칙적으로 제3자에게 배정할 때는 경영상 목적이 분명해야 하는데, 여기에서 '경영상 목적으로 의한 발행'이라는 고려아연의 주장을 법원을 받아들인 것이다.

고려아연 관계자는 "재판부의 현명한 판단에 감사한다. 고려아연의 미래 성장을 견인할 크루서블 프로젝트를 차질없이 진행하고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겠다"면서 "핵심광물 공급망의 중추 기업으로서 국가경제에 기여하고 대한민국의 경제 안보에도 이바지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영풍과 MBK파트너스(영풍 측)는 "법원의 신주발행금지 가처분 기각 결정에 대하여 아쉬움을 표명한다"면서 "이번 절차를 통해 제기되었던 기존 주주의 주주가치 훼손 가능성, 투자 계약의 공정성에 대한 우려, 그리고 고려아연이 중장기적으로 부담하게 될 재무적·경영적 위험 요소들이 충분히 해소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했다.

고려아연은 미 테네시주 클락스빌(Clarksville) 제련소 건설과 관련해 2026년 중 설계·조달·시공 업체 선정과 주요 장비 발주를 진행하고, 2027년 착공할 계획이다. 2029년 완공 뒤 단계적 가동, 2030년 본 가동 등의 목표는 차질 없이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고려아연은 이곳에서 연매출 5조6000억원, 영업이익 1조2500억원 규모의 성과를 기대하고 있다. 고려아연의 미 제련소는 미 정부가 2022년 지정한 총 60종의 광물 중 11종을 생산하게 된다.

고려아연이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전략광물을 생산하게 되면 미 방위산업 업체뿐만 아니라, 반도체·인공지능(AI) 등 첨단 산업, 자동차·화학 등 기업들의 수요가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반도체 공정에 필수적인 갈륨과 고순도 황산 공급이 본격화되면 인텔과 마이크론 등 현지 반도체 기업도 고객군으로 확보할 수 있다.

또 메타, 구글, 아마존 등 AI 기업이 사업에 필수적인 핵심 광물도 조달할 수 있다. 미국에 생산 거점을 둔 국내 기업 한화, LG화학, 현대차 등도 고려아연을 통해 핵심 원료를 확보할 수 있다.

고려아연의 미 제련소 건설이 가시화되면서 전략 광물 공급망을 둘러싼 한미 양국간 협력이 자원 동맹 수준으로 격상될 가능성이 커졌다. 고려아연은 미국뿐 아니라 한국 정부와도 사전 교감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조선협력 마스가(MASGA) 프로젝트에 이어 미 정부가 구상 중인 핵심 안보 협의체 '팍스 실리카(Pax Silica)'의 핵심기업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정우 다올투자증권 연구원은 "미국은 생산 예정 광물인 아연, 연, 구리, 은, 금과 안티모니를 비롯한 희소 금속에 대한 수입 의존도가 높은 편이라 현지 판매는 원활할 전망"이라면서 "데이터센터, AI, 방위산업에 필요한 원재료들이라 전략광물 밸류체인 다변화를 추진하는 미국 수요와도 합치된다"고 했다.

박광래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미 상무부와 전쟁부의 직접적인 지원과 참여는 이 프로젝트가 단순 민간 투자를 넘어선 한미 경제 안보 동맹의 상징적 자산이 될 것임을 시사한다"면서 "기존 기업 투자와 차별화되는 가장 큰 지점은 미 정부의 깊숙한 관여"라고 했다.

다만 영풍 측이 추가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어 법적 분쟁의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법조계에서는 고려아연이 유상증자와 지급보증을 통해 갖게 될 리스크를 어떻게 해소할 지에 대해서 명확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이번 법원의 판단으로 당초 고려아연이 설계한 미국의 투자·자금 조달 방안은 무리가 없이 진행되겠지만, 사업 전반의 리스크 설계에 대한 의문이 해결돼야 한다는 것이다.

영풍 측 관계자는 "앞으로도 고려아연의 경영이 특정 개인이나 단기적 이해가 아닌, 전체 주주와 회사의 장기적 가치 극대화를 위해 진행되도록 모든 제도적·법적 노력을 다하겠다"고 했다.

한 대형 로펌의 통상 전문 변호사는 "고려아연이 설계한 자금조달 구조가 적절한지에 대한 의문은 법원이 해소해 줬다고 봐야 한다"면서 "고려아연이 제공할 기술에 대한 보증, 사업이 계획대로 수익을 내지 못했을 때 지급보증에 따를 위험성 등에 대해서 좀 더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한편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은 지난 8월부터 미 제련소 건설을 두고 미국 정부와 논의를 진행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최윤범 회장은 지난 8월 미국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을 위한 경제사절단의 일원으로 참여해 록히드마틴과 게르마늄 공급·구매 및 핵심광물 공급망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후 지난 10월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는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이 4대 그룹 총수와 함께 최 회장의 참석을 요청한 바 있다. 고려아연은 미국 정부 및 현지 투자자와 함께 총 10조9500억원을 투자해 미국에 제련소를 건설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지난 15일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