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중순 취임 예정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관세 폭탄 예고에 이어 대통령·대통령 권한대행의 탄핵소추 사태 등으로 한국 경제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나라 안팎으로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세계 최고의 기술력으로 무장한 한국 기업들은 글로벌 정상에 도전하고 있다. 세계 속에서 한국을 빛내는 기업들을 살펴본다. [편집자 주]

작년 12월 24일 울산 울주군에 있는 고려아연(010130) 온산제련소 아연 주조공장. 금속 부딪히는 소리와 열기가 가득한 공장 한편에는 약 500도로 달궈진 몰드(틀)에서 모양이 잡혀 나온 아연괴(塊·덩어리) 수백 개가 쌓여 있었다. 무게가 1톤(t)이 넘는 점보 아연괴부터 작은 벽돌이 겹쳐 있는듯한 다이캐스팅(합금)용 아연괴까지 크기,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몰드에서 나온 아연괴가 완전 냉각되기까지 약 1~2시간이 걸려 일부 표면에선 여전히 김이 피어올랐다.

고려아연은 매년 아연을 비롯해 연(납), 은, 동(구리) 등 비철금속 약 10종류를 세계 최대 규모인 120만t씩 생산하고 있다. 대부분 전자제품, 반도체, 자동차, 철강 등 주요 산업의 기초 소재로 쓰인다. 그 중 생산 비중이 가장 높은 게 아연(65만t)이다. 아연은 습기에 닿으면 표면에 얇은 막을 만들어 내부를 보호하기 때문에 자동차 강판, 강관 철선, 철구조물 등 철강재 부식을 막는 코팅제로 주로 활용된다. 장난감 피규어부터 수도꼭지, 지퍼, 버클, 통신장비를 만들 때 사용되기도 한다.

울산 울주군에 위치한 고려아연 온산제련소 아연주조공장./권유정 기자

전 세계에서 고려아연이 비철금속 생산을 주도하게 된 배경에는 차별화된 제련(광석·스크랩 등을 용광로에 녹여서 금속을 분리·추출·정제하는 것) 기술 덕분이다. 비철금속 제련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범용 기술로 여겨지지만, 높은 품질과 경제성을 동시에 유지하는 역량은 고려아연이 독보적이라는 평가다.

고려아연은 원재료인 아연 정광(불순물을 1차 제거한 금속 광석)에서 아연, 연뿐 아니라 금, 은, 동 같은 유가금속, 황산 등을 함께 뽑아낸다. 대부분의 제련소가 아연, 연처럼 단일 목적금속만 취급하는 것과 달리 고려아연은 아연-연-동 통합공정을 운영하고 있다. 아연을 제련하고 남은 부산물에서 아연과 유가금속을 추가로 회수하고 최종 잔재는 시멘트나 아스팔트 원료로 쓰이는 청정 슬래그로 배출하는 아연 잔재처리(TSL) 공법 등 자체 기술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평균적으로 아연 정광에 들어있는 아연은 50.6%로 나머지는 황산 30%, 기타 희소·희귀금속 16.4%, 연 3%, 은 0.006% 등이다. 연 정광도 마찬가지다. 절반 이상인 56%는 연이지만 28.7%는 기타 희소·희귀금속이고 황산(15%), 은(0.311%), 구리(0.035%), 금 (0.0003%) 등이 나머지를 차지한다. 고려아연이 정광 제련 과정에서 발생한 부산물에서 얻는 금은 연간 10t, 은 2500t, 황산 150만t 등에 달한다. 금 10t의 시세는 약 1400억원이다.

김승현 고려아연 온산제련소장은 “다른 제련기업은 목적금속을 추출하고 남은 잔재를 버리거나 싸게 팔지만, 불순물에 들어있는 소량의 희소·희귀금속까지 회수하는 게 고려아연의 수익성 비결”이라고 말했다. 그는 “글로벌 제련 업계 모범 사례로 연구 대상까지 됐지만, 불순물을 다루려면 아주 오랜 경험과 노하우가 필요해 단기간에 역량을 따라잡긴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김승현 고려아연 온산제련소장이 고려아연의 제련 기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권유정 기자

최근 중국 수요 급증, 비용 부담 등이 맞물리며 제련업 전망에 대한 우려도 크지만, 유가금속과 희소·희귀금속 회수율을 끌어올려 수익성을 방어할 수 있다는 게 김 소장의 설명이다. 고려아연은 향후 안티모니, 인듐, 텔레륨, 팔라듐 회수율을 품목별로 20~30% 이상 끌어올린다는 방침이다. 안티모니, 비스무트는 전략광물자원으로 4세대 소형 원자로, 원자력 잠수함, 난연제, 촉매제 원료 등으로 쓰인다.

제련기업은 정광을 제련해주는 대가로 광산업체로부터 제련수수료(TC·Treatment Charge)를 받는다. 회수율은 같은 양의 정광에서 뽑아내는 금속 비율로, 종류마다 차이가 있지만 광산업체와 보통 90% 안팎으로 계약한다. 만약 약속한 비율 이상의 금속을 뽑아내면 이는 제련기업 몫이 된다. 업계에서는 이를 프리메탈(free metal)이라고 부른다. 고려아연은 금속 회수율을 100% 가까운 수준까지 끌어올린 상태다.

고려아연은 비철금속 제련 기술을 토대로 이차전지 전구체(화학 반응에 참여하는 물질)의 주원료인 니켈 사업에서도 존재감을 발휘한다는 계획이다. 2026년 상업 생산을 목표로 구축 중인 ‘올인원니켈제련소’가 신호탄이 될 전망이다. 니켈 정광부터 매트(니켈 함유량 70~75%), 니켈 수산화 침전물(MHP·Mixed Hydroxide Precipitate) 같은 중간재, 폐배터리에서 추출된 블랙파우더(검은색 분말)까지 다양한 원료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시설이다. MHP는 이차전지 전구체용 원료 소재다.

고려아연이 건식(고온에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방식)과 습식(황산 등에 용해한 광석을 전기분해하는 방식) 제련 기술을 모두 갖고 있는데, 이는 니켈 원료를 탄력적으로 활용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니켈 중간재는 니켈 광산에서 나오는 원광석을 건식 제련법을 거치면 매트, 습식 제련법을 거치면 MHP가 된다.

고려아연 올인원니켈제련소 공사 현장. /권유정 기자

이날 온산제련소에서 차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올인원니켈제련소 건설 현장에선 덤프트럭과 크레인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고려아연이 자회사 켐코와 함께 약 5000억원을 투입할 올인원니켈제련소에서는 2026년 말부터 연간 4만3600t의 니켈이 생산될 전망이다. 기존 켐코 생산량까지 합치면 6만5000t이 된다. 이는 전기차 160만대에 들어가는 양이다.

고려아연이 국내에서 생산한 니켈을 전구체 공장에 본격 공급하게 되면 국내 이차전지 공급망의 중국 의존도가 다소 내려갈 전망이다. 전구체는 현재 중국 의존도가 높은 대표적인 품목이다. 양극재 가격의 70%를 차지하는 핵심 소재지만 중국에서 수입하는 비중이 90%를 웃돈다. 고려아연은 LG화학(051910)과 손잡고 자체 전구체 생산공장을 세웠고, 하이니켈 전구체 제조 기술은 국가핵심기술로도 인정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