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8년 최대 전력 수요를 129.3GW(기가와트)로 전망했는데 너무 낮습니다. 전기차 전환과 반도체, 인공지능(AI) 등 IT 강국의 패권을 갖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뒷받침 돼줘야 합니다. 과소 예측으로는 미래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등 4차 산업혁명의 발전을 위해서는 엄청난 전력이 필요하고 정전이 발생하면 과거보다 사회적·재산적 피해가 막대하다”며 “발전소 건설에는 5~15년이 걸리기 때문에 예비율(전력 수급 상태를 나타내는 지표로 예비 전력을 최대 수요로 나눈 값)을 충분히 가져가는 게 좋다”고 말했다.
이어 “최대 전력을 과소 예측하면 비싸지만, 건설 기간이 짧은 태양광, 액화천연가스(LNG)를 중심으로 정책을 설계할 수밖에 없어 비효율이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 원전, 신재생으로 미래 전력 수요 대비해야
에너지 전문가들은 “4차 산업혁명발(發) 전력 수요에 대비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지만, 에너지 믹스(·다양한 에너지원을 활용하는 것) 비율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정부가 지난 5월 발표한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력계획) 실무안은 2038년까지 국내 생산 전기의 70% 이상을 ‘무탄소 전기’로 채우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최대 3기의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고, 차세대 원전으로 개발 중인 소형모듈원자로(SMR)를 활용한 미니 원전 1기도 2035년까지 투입할 계획이다. 또 재생에너지의 양대 축인 태양광과 풍력 발전 설비를 2038년까지 현재의 3배 수준으로 늘리는 방안도 담겼다.
정 교수는 “정부가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를 2038년까지 120GW를 보급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는데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라며 “전력 수요, 탄소 중립, 한국전력(015760) 적자 해소, 전기요금 현실화, 부지 등 해결해야 할 숙제가 많은 상황에서 재생에너지 보급을 현실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태양광 인프라 개발·투자 기업 브라이트에너지파트너스의 김희성 대표는 태양광의 발전 단가가 낮아졌고 향후 더 낮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김 대표는 “현재의 원전 발전단가에는 폐기물 처리와 같은 비용이 굉장히 많이 생략돼 있어 균등화발전비용(LCOE)을 봐야 한다”며 “1GW 원전 1기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15년~20년이 걸리지만, 태양광은 100㎿(메가와트)를 건설하는데 1년으로 동시에 10개를 건설하면 1년 만에 1GW 발전소를 건설할 수 있다. 미래에 폭증할 전력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태양광 등 에너지 믹스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블룸버그 뉴 에너지 파이낸스(BNEF) 보고서를 보면 2022년 기준 글로벌 태양광 발전 LCOE는 메가와트시(㎿h)당 48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수소(239달러), 원자력(225달러), 가스(128달러), 석탄(123달러), 해상풍력(74달러) 대비 낮은 수준이다. LCOE는 발전소 건설부터 폐기까지 발생하는 전체 비용을 운영 기간 생산한 총발전량으로 나눈 값이다.
김 대표는 “태양광의 균등화발전비용은 석탄발전, 원자력과는 비교도 안 되게 저렴해졌다. 우리나라도 태양광의 그리드 패리티(grid parity·신재생에너지와 전통에너지의 발전단가가 동일해지는 시점)가 눈앞에 와 있다”며 “태양광 사업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모듈, 인버터 등의 가격이 급격히 내려가고 있다. 또한번 설치하면 원재료비가 안 들고 유지 보수비도 저렴하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가격 경쟁력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국의 에너지 자립률을 높이려면 수소를 개발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산업통상자원부 출신 고위 관료는 “원전은 에너지를 해외에서 사지 않고 우리가 직접 만들 수 있는 발전원인데, 수소 역시 생태계를 구축한다면 에너지 믹스에 굉장한 유연성을 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미 LNG 발전을 해본 경험이 있고 수소차, 수소버스, 수소지게차, 연료전지 등의 제품군을 보유하고 있어 수소 생태계 구축에 유리하다. 기업들이 사업 모델을 만들고 있지만, 정부 정책의 불확실성이 아직 크다. 정부가 빠른 의사결정과 정책 지원을 통해서 이런 불확실성을 해소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 송배전 없어 발전소 멈춰… “민간 참여 유도해야”
전문가들은 발전소 건설 추진과 송·배전망 투자 및 건설 부지에 대한 고민이 병행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윤석열 정부는 신규 원전을 짓겠다고 했지만, 문재인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추진하면서 신규 원전 건설을 백지화해 현재 원전 사업 예정지는 한 곳도 없다. 또 11차 전력계획에서는 원전·태양광·해상풍력을 늘리겠다고 했으나 대부분의 발전소가 지방에 지어져 수도권으로 끌어오기 위해서는 송·배전망 투자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
GS동해전력과 강릉에코파워, 삼척블루파워, 삼척빛드림 등이 운영하는 석탄화력발전소 8기는 전력을 수도권으로 보낼 송전망이 없어 지난달 중순부터 전력 생산을 전면 중단했다. 김동철 한국전력 사장은 지난달 28일 기자회견을 열고 하남시의 동서울변전소 옥내화·증설사업 인허가 불허에 유감을 표명하기도 했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에너지기술정책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여건상 용수가 많이 필요한 원전이나 적절한 자연조건이 필요한 태양광·풍력은 강원이나 영남, 호남 등 비수도권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며 “대규모 적자 상태인 한전이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송배전망 문제는 앞으로 더 심각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수조 원대의 송배전 투자의 해법으로 민간 개방을 꼽았다. 유 교수는 “과거 정부는 발전에만 관심을 두고 송배전에 대한 투자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는 전기요금을 억누르면서 한전 적자를 초래했고 결국 송배전 투자를 하지 못했다”라며 “윤석열 정부가 들어섰지만 한전 적자에 대한 자구책을 요구하면서 자연스럽게 송배전망 투자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됐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나라의 송전 분야 투자와 보급 수준은 계획보다 10년 이상 지연된 상태”라며 “또 전 세계적으로 배전을 1개 기업이 독점하는 곳은 우리나라밖에 없다. 일본만 해도 배전 기업이 400개~500개가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의 경우 기업들이 경쟁하면서 도시가스와 전기요금의 합친 결합상품이 등장하는 등 소비자들에게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기업이 투자해 송전 선로를 깔고 이를 한전이 기부채납 받는 식으로 운영하면 민간의 참여를 유도하면서도 공공성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전기요금 인상에 대한 국민 부담도 낮출 수 있다”고 말했다.
정지연 한국소비자연맹 사무총장은 탄소중립 등 지속 가능한 사회로 가는 방향은 맞지만, 전기요금 인상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정 사무총장은 “유기농 제품 가격이 비싸지만,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 소비자들이 비용을 지불하는 것처럼 전력도 소비자들이 고려할 수 있는 선택지를 제공해야 한다”며 “기업들이 배전에 참여하게 해서 경쟁을 유도하고 다양한 요금제가 나올 수 있게 해야 한다. 전력은 필수재이기에 저소득층, 소상공인 등에게는 복지의 관점에서 요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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