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주기적으로 중장기 에너지 계획을 수립한다. 미래 전력 수요를 예상하고 그에 맞는 공급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수립돼야 할 에너지 정책이 정치화되면 그 피해는 국민과 기업에 돌아온다. 에너지 정책 수립 과정의 미비점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과 대안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10기의 전기로(電氣爐·전기로 열을 내는 화로)를 운영하는 현대제철(004020)은 지난해 전기요금이 2022년 초보다 약 5100억원 늘었다. 현대제철은 철강사 중에서도 전기로 비중이 커 ㎾h(킬로와트시)당 전기료가 1원이 오르면 원가가 약 100억원 늘어나는데, 산업용 전기요금이 지난 2022년 2분기부터 지난해 4분기까지 총 6번에 걸쳐 (㎾h)당 총 51원이 올랐기 때문이다.

건축자재 업체 KCC글라스(케이씨씨글라스)는 올해 2분기 영업이익이 216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5.5% 감소했다. KCC글라스는 유리를 제조하는 화로를 하루도 쉬지 않고 가동하는데, 지난해 전기요금이 오르면서 전기료 부담이 커졌기 때문이다.

전남 나주 한국전력 본사 사옥 모습. /뉴스1

◇ 만성적자 한전, 안정적 전기 공급 차질 우려

윤석열 정부가 출범 직후인 2022년 2분기부터 전기요금을 올린 이유는 한국전력(015760)의 적자를 더는 그대로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올해 상반기 말 기준 한전의 부채 규모는 약 203조원으로 한 달에 상환해야 하는 이자만 3750억원이다. 6월 말 한전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2조6567억원에 불과하다.

한전이 부실해진 이유는 탈원전 정책을 추진한 문재인 정부가 값싼 원전 발전을 줄이고 액화천연가스(LNG)나 신재생에너지 발전을 늘리면서도 전기요금을 동결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h당 전력 도매가격은 원전이 55원, LNG 214원, 신재생에너지 171원이었다. 한전은 이렇게 산 전기를 ㎾h당 150원 안팎에 팔았다. LNG, 신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으면 전기를 팔수록 손해를 보는 구조다. 태양광과 원전이 동시에 가동될 때 한전이 태양광 발전 전기를 우선 구매하도록 한 점도 재무 부담을 키우는 요소다.

그래픽=손민균

이명박 정부(2008~2012년) 시절 원전 이용률은 평균 89.9%였으나 박근혜 정부(2013~2016년) 때는 81.4%로 떨어졌고 문재인 정부에선 71.5%로 낮아졌다. 전체 발전원 중에서 원전이 차지하는 비중은 이명박 정부 때 평균 32.4%에서 박근혜 정부 29.5%, 문재인 정부 26.5%로 하향 곡선을 그렸다. 값싼 발전원인 원전의 비중은 줄었지만 ‘탈원전 정책 때문에 전기료가 오른다’는 비판을 의식한 문재인 정부가 전기료 인상을 막으면서 한전은 2021년 2분기부터 작년 2분기까지 9개 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했다. 이 기간 누적 적자는 약 47조5000억원에 달한다.

한국전력이 만성 적자에 허덕이면서 송배전망 구축, 안정적인 전기 공급 등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한전의 재무구조가 안정화되려면 과학적인 전력 수급 분석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미래에 예상되는 전력수요를 과학적으로 분석해야 저렴하고 안정적인 전기 공급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미래 전력수요를 과소 예측하면 부족분이 예상될 때 건설 기간이 짧지만 비싼 발전원을 쓸 수밖에 없게 된다.

SK넥실리스의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 동박공장./SKC 제공

◇ 전기료 급등에 한국 떠나는 기업들

윤석열 정부는 2022년 2분기부터 지난해 2분기까지 ㎾h당 전기요금을 총 40.4원 올렸고, 작년 4분기에는 산업용 전기요금만 ㎾h당 평균 10.6원 인상했다. 가계보다는 기업이 전기요금 인상에 대한 저항이 적기 때문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산업용 전기요금은 ㎿h(메가와트시) 당 122.1달러로 비교 가능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35개국 중에서 26위를 기록했다. 전체 순위에서는 높지 않은 수준이지만, 2021년(30위·95.6달러)이나 2022년(31위·95.3달러)보다는 상승했다.

그래픽=손민균

전기요금이 단기간에 급격하게 오르면서 전기를 많이 쓰는 기업은 전기료가 싼 해외로 공장을 옮긴다. 태양광용 폴리실리콘 제조업체 OCI홀딩스(010060)는 전북 군산 공장 설비를 전부 떼어내 2022년 말레이시아로 이전했다. OCI홀딩스는 전기료가 생산원가의 약 40% 차지하는데, 말레이시아 전기료는 한국의 3분의 1 수준이기 때문이다.

동박(銅箔·얇은 구리막)을 만드는 SK넥실리스와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020150)도 원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전기료가 싼 말레이시아에 공장을 지었다.

미국은 아예 저렴한 전기료를 내세워 기업을 유치하고 있다. 삼성전자(005930), 현대차(005380), LG에너지솔루션(373220) 등 한국 기업이 대거 진출한 텍사스주, 조지아주의 전기요금은 지난해 ㎾h당 평균 77.6원, 83.4원으로 한국의 절반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전기료가 정치적 협상의 대상이 되면서 에너지 시장 구조가 왜곡됐다고 본다. 이런 구조가 고착되면 향후엔 에너지 공급 자체가 문제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조홍종 단국대 교수는 “전반적으로 비용에 대한 문제를 풀지 못하면 전력산업의 위기를 해결하지 못한다”며 “경제 논리로 풀어야 하는 걸 정치적으로 접근하고 이분법적으로 나누면서 (에너지 문제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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