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010130)이 지난 50년간 비철금속 분야에서 쌓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신사업에 도전할 수 있던 배경에는 창업자와 경영진의 헌신이 있다. 대규모 제련소 건설이라는 최기호 고려아연 창업자의 목표를 이어받은 세 아들 최창걸·창영·창근 명예회장은 이후 글로벌 시장에서 회사의 존재감을 키워갔다.

1975년 6월 산업기지개발공사와 온산제련소 부지 조성 협약을 체결하는 최기호(오른쪽에서 세 번째) 고려아연 창업자. /고려아연 제공

최기호 창업자는 광산업, 무역업을 거쳐 영풍 석포제련소를 운영하다가 비철금속 사업에 뛰어들었다. 지난 1973년 정부는 ‘중화학공업화’를 공식 선언하면서, 경남 울주군 온산공업단지 내 비철금속 제련소를 건설하는 내용 등을 포함한 산업 육성 계획을 내놓은 것이 계기가 됐다.

최 창업자는 석포제련소가 위치한 입지 등을 고려할 때 물류 측면에서 성장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고, 온산에 대규모 제련소를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당시 석포제련소의 연 생산량은 6000톤(t) 수준으로, 연 5만t 규모의 온산제련소를 짓기 위해서는 기존보다 개선된 기술과 경영 능력이 요구됐다.

최 창업자는 일본뿐 아니라 유럽에서 선진 기술을 도입해 온산제련소에 적용했다. 대부분의 국내 기업이 일본으로부터 기술을 들여오던 시기였던 만큼, 유럽으로 방향타를 돌린 그의 판단은 업계에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고려아연은 1974년 설립 이후 1975년 7월 일본 동방아연, 같은 해 9월 벨기에 메심과 기술 도입 계약을 맺었다.

2002년 열린 고려아연 명예회장과 회장, 부회장 이취임식. 왼쪽부터 최창영 명예회장, 최창걸 명예회장, 최창근 명예회장. /고려아연 제공

최 창업자의 사업 확장에 대한 의지는 세 아들인 최창걸·창영·창근 명예회장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일찍이 아버지 뜻에 따라 최창걸 명예회장은 경영학, 최창영 명예회장과 최창근 명예회장은 각각 금속학, 자원학을 전공한 뒤 미국 유학을 거쳐 회사 경영에 합류했다.

첫 째인 최창걸 명예회장은 대규모 제련소를 토대로 고려아연이 출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고려아연이 세계은행 산하 금융기구인 국제금융공사(IFC)를 통해 제련소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투자와 차관 협정 체결을 이끌었다.

(왼쪽부터) 최창걸·최창영·최창근 고려아연 명예회장. 가운데는 최창영 고려아연 명예회장이 2011년 5월 서울대 공과대학 발전공로상을 수상한 모습. 오른쪽은 최창근 고려아연 명예회장이 2010년 11월 상동광산 인수 관련 업무협약(MOU)을 체결한 모습. /고려아연 제공

최창영 명예회장은 고려아연의 비철금속 제련 기술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온산제련소가 부지 정지 작업을 마치고, 건설을 본격화하던 1976년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한 최창영 명예회장은 제련소에 각종 선진 기술을 도입하는 데 앞장섰다.

최창영 명예회장은 지난 2006년 서울대학교 한국공학한림원이 주관한 ‘한국을 일으킨 60인의 엔지니어’에 선정됐고, 2010년에는 ‘대한민국 100대 기술과 주역 시상식’에서 TSL(Top Submerged Lane) 기술이라는 고려아연의 잔재 처리 공법으로 상을 받았다. 고려아연은 TSL 기술로 세계 최초로 제련 잔재물의 90% 이상을 처리하는 데 성공했다.

최창근 명예회장은 자원 분야 전문가로서 고려아연의 안정적인 광석 수급 기반을 닦았다. 주요국 광산을 직접 돌며 프로젝트를 점검하고, 현장 경영을 통해 수급 상황을 개선하는 데 집중했다. 그 결과 고려아연은 세계 아연정관 가격 기준이 되는 리딩 기업이 됐다. 매년 1회 협상을 통해 결정되는 벤치마크 TC(제련 수수료)는 고려아연이 광산업체들과 맺는 계약조건이 글로벌 기준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