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6월 2030 세계박람회(엑스포) 민간유치위원회가 출범되고 나서 민간위원장을 맡은 최태원 SK(034730)그룹 회장을 비롯한 국내 주요 기업 총수들은 세계 각국을 누비면서 엑스포 유치 지원에 나섰다. 대통령 해외 순방에 동행하고 각종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회원국 인사들을 직접 만나 막판까지 표심을 얻는 데 집중했다.

재계 총수들이 지난 6월 20일(현지 시각) 프랑스 이시레물리노에서 열린 제172차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에 참석해 윤석열 대통령 부부와 함께 부산엑스포(2030부산세계박람회) 유치를 위한 4차 경쟁 프레젠테이션(PT)을 보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28일(현지 시각) 프랑스 파리에서 부산 엑스포 개최 여부를 결정하는 국제박람회기구(BIE) 제173차 총회가 열린다. 개최 후보지인 부산은 이탈리아 로마,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와 경쟁한다. 1차 투표에서 182개 회원국 중 3분의 2 이상을 득표한 도시가 나오면 개최지가 된다. 1차 투표에서 3분의 2 이상 지지를 얻은 도시가 없으면 1·2위를 두고 2차 결선 투표로 이어진다.

당초 부산은 리야드, 로마보다 한발 늦게 유치에 뛰어들면서 초반에는 리야드에 한참 밀린다는 평가가 많았다. 하지만 민·관이 한 팀으로 역량을 쏟아부으면서 판세는 박빙 열세로 바뀌었다. 사우디를 공개 지지하는 국가가 많지만, 부산이 리야드를 바짝 뒤쫓은 데다 비밀투표로 진행되는 만큼 결과는 예측하기 어렵다는 관측이다.

판세를 뒤집는 데는 전면에 나선 재계 총수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최 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005930) 회장, 정의선 현대차(005380)그룹 회장, 구광모 LG(003550)그룹 회장 등은 지난 1년간 정부 득표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왔다. 투표일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는 프랑스 파리에 집결해 대통령과 오·만찬을 함께 하고, 각국 BIE 대사를 만나 부산 지지를 호소했다.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지난 7월 12일 대한상의 제주포럼에서 개회사를 하기 위해 연단에 올라 자신의 목발을 들어 보이고 있다. 최 회장은 "다리는 부러졌지만 여러분에게 행운을 나눠 드릴 수 있기 때문에 부러진 다리도 괜찮지 않나 생각하고 열심히 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대한상의 제공

최 회장은 지난 10월부터 파리에 ‘메종 드 부산’(부산의 집)이라는 공간을 마련해 직접 상주하면서 유치 활동을 벌였다. 그가 파리에 장기간 머무는 탓에 SK그룹이 매년 경영 전략을 논의하는 ‘CEO 세미나’가 파리에서 열리기도 했다. 최 회장은 파리에 있는 기간에도 중남미, 유럽 등 7개국을 방문하는 일정을 소화했다. 표심을 결정하지 않은 부동층 국가를 파악해 한 표라도 더 얻겠다는 전략이었다.

최 회장의 목발 투혼도 한때 화제였다. 그는 지난 6월 테니스를 치다가 발목을 다쳤는데, 이후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은 채로 3개월 이상 엑스포 유치 활동을 이어갔다. 깁스와 목발에는 부산 엑스포 로고를 새긴 홍보 패드까지 붙였다. 최 회장은 BIE 총회 리셉션에서는 건배사로 ‘break a leg’(다리가 부러졌다)를 외쳤다. ‘break a leg’가 ‘행운을 빈다’는 말로 쓰이는 점을 활용한 것이다.

이재용 회장도 해외 각국을 돌면서 엑스포 유치를 지원했다. 연초부터 아랍에미리트(UAE), 스위스, 일본, 중국 등을 방문한 이 회장은 현지에서 주요 인사들과 면담을 가졌다. 그는 개최지 투표에서 캐스팅 보트(가부 동수일 때 승패를 결정하는 투표)로 불리는 카리브해 연안국, 아프리카 국가 등 태평양도서국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기도 했다. 지난 7월 통가를 찾은 이 회장은 이달 초 남태평양 쿡 제도에서 열린 태평양도서국포럼(PIF)도 직접 챙겼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22일(현지 시각) 영국 런던 금융특구 길드홀에서 열린 런던금융특구 시장 주최 만찬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회장은 지난 24일 파리에서 BIE 대표들과 가진 오찬에서 건배사를 통해 삼성과 부산의 인연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할아버지인 고(故) 이병철 회장이 1953년 부산에 제일제당 공장을 설립했다고 언급하며 “미래 도시인 부산이 엑스포를 통해 국제사회에 자유와 연대를 확산해 나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날 오찬에는 윤 대통령도 함께했다.

정의선 회장은 2021년 8월 대기업 중 가장 처음으로 엑스포유치지원전담조직(TF)를 꾸렸다. 정 회장은 체코, 슬로바키아 등 현대차 사업장이 있는 국가를 중심으로 각국 총리를 만나 엑스포 지지를 당부했다. 올해 2월에는 미국 워싱턴DC에서 주미 한국대사관 주관으로 열린 아프리카 및 카리브해, 태평양 연안 주요 12개국 주미대사 초청 행사를 찾아 유치 활동을 벌였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23일(현지 시각) 파리 시내의 한 호텔에서 열린 국제박람회기구(BIE) 대표 교섭 만찬에서 건배사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구광모 회장 역시 아프리카 BIE 회원국과 사업장이 있는 폴란드 등에서 엑스포 유치를 위해 직접 뛰었다. 구 회장은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와 만나 인증 사진을 남기기도 했다. 연고지가 부산인 롯데그룹도 신동빈 회장을 중심으로 엑스포 유치 지원 TF를 구성했다. 신 회장은 대통령의 영국 방문을 함께하고 파리로 이동해 엑스포 막판 총력전에 힘을 보탰다.

정부와 재계에 따르면 민관 합동 2030 부산엑스포 유치위원회는 지난해 7월 출범 이후 509일 동안 유치 활동을 위해 지구를 496바퀴(1989만1579㎞) 돌았다. 재계 총수와 경영진이 이동한 거리는 지구 197바퀴(790만㎞)에 달한다. 대기업 그룹사 12곳은 18개월 동안 총 175개국, 3000여명의 정상 및 장관 등을 만난 것으로 파악됐다.

엑스포 유치 공동 경비로 기업들은 약 300억원의 특별 회비를 자발적으로 제출했고, 개별 유치 활동으로도 수십억원을 지출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