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4억원의 원자력 발전 예산이 삭감되면 민간기업의 투자 위축으로 이어져 그 후폭풍은 2~3배 이상이 될 것 같습니다. 야당이 (탈원전 정책에 이어) 원전 업계를 두 번 죽이는 일입니다. 에너지는 죄가 없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이 정부의 내년도 원자력 발전 예산을 전액 삭감하면서, 원전 업계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거대 야당의 ‘예산 독주’로 원전 생태계를 복원하려는 정부 계획에 상당한 차질이 예상된다. 원전 수출보증, 생태계 연구개발(R&D) 지원 사업은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아사(餓死) 위기에 내몰린 원전 업계에 직접적인 효과가 기대됐으나 예산 삭감으로 또 타격을 입게 됐다.
21일 원전 업계와 국회 등에 따르면 민주당은 지난 20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원전 예산을 삭감하는 내용의 내년도 산업통상자원부 예산안을 단독 의결했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민주당의 예산 삭감에 반발해 회의에 불참했다.
민주당이 삭감한 원전 예산은 총 7개, 1813억7300만원 규모다. 원자력 업체를 위한 금융지원 예산(1000억원)을 전액 삭감했고 시제품 제작 지원과 인력 고용 등 단시간 내 기업을 지원할 수 있는 원자력 생태계 지원사업(112억800만원)도 삭감했다.
원전 관련 기업은 문재인 정부 5년간 수주가 끊겨 자력으로 회복하기 힘든 상황이다. 한 원전 협력사 대표는 “수주가 계속 있었다면 과거에 번 수익으로 공장을 돌릴 수 있는데, 문재인 정부 때 수주가 완전히 끊겼기 때문에 지금은 일감을 수주해도 공장을 돌릴 자금이 없다”고 말했다.
2023년 원자력 산업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21년 원자력산업 분야 매출액은 21조5860억원으로 문재인 정부 출범 직전인 2016년(27조4513억원) 보다 21.3% 감소했다. 국내 원전 매출이 8년 전인 2013년 수준으로 후퇴한 것이다.
원전 기자재 등을 납품하는 중소 ‘원자력공급산업체’의 매출 감소 폭은 더 컸다. 원전 건설 중단 등으로 2016년 5조5034억원이던 매출액은 2021년 3조9269억원으로 28.6% 줄었다. 매출 100억원 미만의 원전 중소업체 비중은 2016년 79.4%에서 2021년 88%로 급증해 영세화가 가속화됐다.
원전 업계가 절실히 요구했던 원전 대금 선지급 문제도 발목이 잡혔다. 원전 기자재 업계의 선금 보증보험 수수료를 50% 지원해주는 예산 57억8500만원을 민주당이 전액 삭감했기 때문이다. 자금난을 겪는 원전 업계는 납품 이후 지급되던 대금을 계약 시에 선지급하는 방안을 정부에 요구해 왔다. 선금 제도는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챙길 만큼 관심 사항이었다.
원전 수출에도 비상이 걸렸다. 정부는 취약한 재무 상황 등으로 수출보증 발급이 어려운 원전 수출 중소‧중견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수출 보증보험 예산(250억)을 편성했지만 민주당이 삭감했다. 수주
를 완료한 이집트 엘다바 원전과 루마니아 삼중수소 설비 수출을 비롯해 현재 추진하는 헝가리, 체코, 폴란드 원전 수주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예산 삭감에 원전 연구소나 학계도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다. 내년 본격적인 착수를 앞둔 혁신형 소형모듈 원자로(i-SMR) R&D 사업(332억8000만원), 현장 수요 대응 원전 첨단 제조 기술 및 부품·장비 R&D 사업(60억원), SMR 제작 지원센터 구축사업(1억원) 등도 모두 사라졌다.
SMR은 일반 원전보다 안전성과 경제성이 높아 에너지 시장의 게임 체인저(판을 뒤흔들 제품)로 꼽히는데, 시작하기도 전에 좌초될 위기에 빠졌다. 한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문재인 정부 시절 원전 신기술 개발 등 산업 진흥을 위한 연구를 하겠다는 것은 금기어로 불렸다”며 “야당의 예산 삭감은 원전 신기술은 아예 개발하지 말라는 얘기”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선 민주당이 여당과의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예산 삭감에 나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회법에 따르면 내년도 예산안은 소관 상임위원회 의결을 거쳐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 회부된다. 상임위가 삭감한 예산을 되돌리려면 예결위는 소관 상임위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