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5월 출범한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전면 폐지하고 ‘원전 최강국’을 건설하겠다고 공언했다. 새 정부는 2018년 65%까지 추락했던 원전 가동률을 81%대까지 끌어올리고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개 등을 추진하며 원전 정상화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탈원전을 위해 심어놓은 대못 탓에 원전 산업 정상화는 예상보다 속도가 나지 않고 있다. 원전 산업 회복에 걸림돌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편집자주]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은 공무원 세계에 ‘적폐 포비아(공포증)’를 불러왔다. 전 정권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한 공무원이 다음 정권에서 인사상 불이익을 받는 경우는 과거에도 있었으나 고발, 수사의뢰 등 형사처벌까지 간 적은 거의 없었다. 문 정부는 적폐 청산을 100대 국정 과제 중 1호로 꼽고 부처마다 태스크포스(TF)를 꾸리도록 했다.

문 정부는 탈원전 정책을 펼치면서 에너지 관련 고위 인사를 전원 교체했다. 한 국장은 에너지 공기업 사장 선임 과정에서 부당한 압력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구속됐으나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당시 공무원 사이에서는 나중에 정권이 바뀌면 탈원전 정책을 추진한 게 또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말이 돌았고, “열심히 일하면 처벌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확산됐다.

윤석열 정부는 원전 복원을 공약으로 내걸었으나 공무원들은 규정을 꼼꼼하게 검토하고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에서 생긴 ‘적폐 포비아’가 공무원의 복지부동(업무를 하는데 몸을 사리는 것)에 대못을 박은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신규 원전을 짓겠다고 했지만, 올해 1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처음 마련한 전력수급기본계획(10차)에는 신규 원전 계획이 반영되지 않았다.

정부세종청사 중앙동./행정안전부 제공

10차 계획 이후 원전 업계에서는 새 정부의 원전 복원을 체감하기 어렵다는 실망이 쏟아졌다. 대통령실에서도 “애매한 스탠스(입장) 땐 인사 조치하겠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이후에도 산업통상자원부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5월 에너지·원전 정책을 총괄하는 제2차관을 교체했고, 지난달 22일에는 신임 장관 후보자로 방문규 국무조정실장을 지명했다. 산업부 장관에 기획재정부 출신이 오는 것은 2017년 주영환 장관 이후 6년 만이다.

방문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후보자. /뉴스1

이번 인사는 새 정부가 출범한 지 1년이 지났지만 탈원전 정책 폐기와 원전 생태계 복원의 속도가 더디다는 대통령실과 여권의 강한 불만이 반영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기류를 감지한 방 후보자는 지명 직후 “원전 생태계 복원 조기 완성과 규제 철폐를 속도감 있게 추진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방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는 이달 13일로 예정돼 있다.

10차 계획은 문재인 정부 임기말인 2021년 12월 첫 회의가 열렸다. 대선 전이라 논의는 지지부진했고 윤석열 대통령 인수위원회가 꾸려진 2022년 3월부터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됐다. 윤 정부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등 급증하는 미래 전력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신규 원전 등을 추진했다. 하지만 10차 계획에는 신한울 3·4호기와 기존 원전 계속 운전 등만 반영됐을 뿐 신규 원전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업계 관계자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개발 계획은 문 정부 시절인 2019년 2월 발표됐다. 산업부가 당시 대선을 6~7개월 앞두고 보수적인 시각으로 접근한 것 같다”고 말했다. 10차 계획에 신규 원전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면 1년의 시간 낭비 없이 부지 확보 등 관련 예비 절차를 미리 추진할 수 있었다.

강경성 산업부 2차관이 지난달 29일 서울 서초구 한전아트센터에서 열린 '원전 수출일감 통합 설명회'에 참석해 축사하고 있다./산업부 제공

산업부가 내년 상반기까지 마련할 11차 계획에는 신규 원전 내용이 포함될 것으로 전망된다. 방 후보자는 기재부에서 예산·재정 관련 보직을 두루 거쳤고 국조실장 때도 원전 복원 정책에 신경을 많이 썼다.

산업부 공무원 사이에서는 불만의 목소리도 나온다. 정권에 따라 에너지 정책이 오락가락하면서 실무를 담당하는 공무원만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세종시의 한 공무원은 “적폐 청산 이전에는 일하는 공무원은 건들지 않는다는 일종의 약속이 있었다”며 “공무원이 소신에 따라 일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