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그룹의 중흥기와 몰락을 함께 했던 김석원 전 회장이 향년 78세로 별세했다. 김 전 회장은 레미콘 위주의 회사였던 쌍용그룹을 중공업과 건설, 석유, 자동차를 아우르는 그룹으로 성장시킨 주역이다. 한때 재계 서열 6위까지 오르며 성장가도를 달렸지만, 쌍용차에 대한 무리한 투자와 갑작스러운 정계 진출, 외환위기(IMF) 등이 겹치며 그룹이 해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성곡언론문화재단은 김 전 회장이 26일 새벽 3시쯤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밝혔다. 성곡은 쌍용그룹의 창업주인 김성곤 전 회장의 호다.
대구 출신인 김석원 전 회장은 서울고등학교와 미국 프랭클린 피어스 대학교 경영학과, 브랜다이스 대학교 경제학과, 서강대학교 대학원 수학과 석사 과정 등을 거쳤다. 미국 유학 중에 귀국해 해병대에 자원입대하기도 했다.
김 전 회장은 1975년에 부친인 김성곤 전 회장이 타계하자 쌍용그룹을 물려받았다. 당시 나이가 만 29세에 불과했다. 김 전 회장이 쌍용그룹을 물려받을 때만 해도 그룹은 레미콘이 중심인 중견 기업 수준이었다.
창업주인 김성곤 전 회장은 해방 이후 고려화재해상보험(흥국화재), 금성방직을 설립했고 동양통신을 창간하며 언론 사업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러다 1962년 쌍용이라는 이름이 처음 들어간 쌍용양회를 설립하며 레미콘 사업에 뛰어들었다. 쌍용이라는 이름은 쌍용양회 영월공장의 주소지인 영월군 쌍용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진다. 1960년대 들어 건설업이 호황을 맞으면서 쌍용양회도 급성장했고, 김성곤 전 회장은 다른 회사들에도 쌍용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쌍용그룹을 만들었다.
김성곤 전 회장은 정계 진출에도 꾸준히 관심을 가졌는데, 민주공화당 재정위원장을 맡아 1970년대 초반까지 정계에서도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1971년 10·2 항명 파동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눈 밖에 나면서 정계에서 밀려났고, 이후 건강까지 악화해 1975년 회장 자리를 아들인 김석원 전 회장에게 물려주게 된 것이다.
쌍용그룹의 2대 회장인 김석원 전 회장은 타고난 사업 감각으로 그룹을 빠르게 성장시켰다. 그는 회장 자리를 물려받기 전인 1974년 용평 스키장 사업을 시작했는데, 자신이 직접 대관령 스키장에 놀러갔다가 스키 산업이 유망할 것이라고 보고 직접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김 전 회장은 회사를 물려받은 뒤 중화학과 금융업을 중심으로 쌍용그룹의 세를 키웠다. 덕분에 1980년대에는 쌍용그룹의 재계 순위가 6위까지 올라갔다.
자동차 애호가로 유명한 김 전 회장은 1986년에 동아자동차를 인수하며 자동차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그는 미국 유학 시절에 레이싱 스쿨을 수료할 정도로 자동차를 좋아했다고 한다. 동아자동차에서 쌍용자동차로 간판을 바꿔단 이후 코란도 훼미리가 출시됐고, 코란도는 김 전 회장의 출근차로 선전되며 국내에서 인기를 끌었다.
쌍용자동차는 영국의 스포츠카 회사인 팬더 웨스트윈즈도 인수했는데 스포츠카에 관심이 많은 김 전 회장의 선호가 반영된 것이라는 말이 많았다. 실제로 쌍용자동차는 1992년 스포츠카인 팬더 칼리스타를 출시하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김 전 회장과 쌍용그룹 모두 탄탄대로를 달리는 듯 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만에 김 전 회장과 쌍용그룹 모두 내리막길을 걷는다. 김 전 회장은 정치권에 발을 들이지 말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어기고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그룹 회장 자리는 동생인 김석준 전 회장에게 넘겼다.
하지만 김 전 회장의 정계 진출은 채 2년을 넘기지 못했다.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쌍용그룹이 위기를 겪자 1998년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김 전 회장의 사퇴로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인물이 박근혜 전 대통령이었다.
김 전 회장이 돌아왔지만 쌍용그룹의 재정난은 회복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김 전 회장이 주도했던 쌍용차에 대한 무리한 투자가 부메랑으로 돌아왔고, 결국 쌍용그룹은 대우그룹에 쌍용차를 매각했다. 하지만 2조원에 달하는 쌍용차의 부채가 계속 그룹의 발목을 잡았고 결국 쌍용그룹은 2000년에 해체됐다.
21세기 들어서는 김 전 회장은 두문불출했다. 몇 차례 좋지 않은 일로 검찰의 수사 대상에 오르거나 가정사로 언론에 이름을 올린 게 전부였다.
외환위기를 겪으며 불명예스럽게 퇴진했지만, 김 전 회장은 국내 동계스포츠와 레저산업의 초석을 닦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1982년 한국스카우트연맹 총재로 선출돼 스카우트 운동에도 많은 공을 들였는데, 32년 전 고성 잼버리를 유치해 성공적으로 치러내기도 했다. 고성 잼버리 당시 김 전 회장이 직접 야영장을 돌아다니며 상황을 점검하고, 진행요원들에게 잼버리 정신을 설파한 일화는 아직까지도 유명하다.
고인의 유가족에는 성곡미술관을 운영하는 부인 박문순씨와 아들 김지용(학교법인 국민학원 이사장), 김지명(JJ푸드 시스템 대표), 김지태(태아산업㈜ 부사장)씨가 있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른다. 빈소는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특1호실이다. 발인은 29일 오전 7시, 장지는 강원도 용평 선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