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2차전지(배터리) 기업이 잇따라 대규모 투자에 나서면서 관련 장비사 수주잔고도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두 자릿수 급증하는 등 빠르게 늘고 있다. 수주잔고는 시차를 두고 매출로 인식되기 때문에 실적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주요 지표 중 하나로 꼽힌다. 장비사가 고객사 주문을 받아 제품을 제조, 인도해 실적으로 잡히기까지 걸리는 리드타임은 통상 12개월 정도로 알려졌다.

올 들어 배터리 기업의 시설투자가 경쟁적으로 이어지고, 이런 계획이 내년까지 줄줄이 예고돼 있어 장비사들의 수주 활황은 적어도 2024년 말까지 지속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 국내 배터리 3사의 합산 생산능력만 봐도 2022년 367GWh(기가와트시)에서 2025년 931GWh로 증가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픽=손민균

17일 세종기업데이터가 2차전지 장비사 수주잔고를 집계한 결과를 보면, 2분기 말 기준 피엔티(137400) 수주잔고는 1조7429억원으로 작년 2분기(1조3353억원)보다 30% 넘게 증가했다. 같은 기간 씨아이에스(222080)도 4846억원에서 7806억원으로 61% 늘었고, 티에스아이(277880)도 1499억원에서 2743억원으로 83% 급증했다.

양극·음극판을 분리막과 함께 셀 형태로 제조하는 조립공정을 담당하는 하나기술(299030)은 2분기 말 수주잔고가 3792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110% 이상 늘었다. 유일에너테크(340930)도 877억원으로 44.5% 증가했다. 이를 활성화하는 화성공정의 에이프로(262260) 수주잔고도 1486억원으로 54% 증가했다. 자동화, 검사, 테스트 등을 포함하는 기타 후공정 업체인 에스에프에이(056190), 코윈테크(282880), 엔시스(333620) 수주잔고도 1년 전보다 눈에 띄게 늘어났다.

2차전지 장비는 반도체·디스플레이와 비교해 기술력이 높지는 않지만, 진입 장벽은 높은 것으로 알려진다. 업계 관계자는 “배터리사는 주로 대형 고객사와 거래한 경험(레퍼런스)에 높은 점수를 주고 발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전극·조립공정을 중심으로 실적이 좋은 업체들이 수주를 나눠 먹는 경향이 있다”면서 “장비사들은 수익성 확보를 위해 원가 절감을 위한 기술 개발에 나서고, 또 이를 적용해 대규모 수주를 받는 식으로 몸집을 불려 나가고 있어 신규 장비사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최근 후공정 업체인 에스에프에이가 전극공정에서 실적을 확보하고 있는 씨아이에스를 인수한 배경도 이런 이유 때문으로 풀이된다.

시장조사기관 SNE리서치에 따르면 전 세계 2차전지 생산능력은 2021년 994GWh에서 2030년 8247GWh로 연평균 27%의 높은 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 장비사들은 국내 배터리 3사의 대규모 투자로 레퍼런스를 확보한 데다 중국보다 정교한 기술력을 평가받고 있어 해외 시장에서도 입지를 다져나가고 있다.

배터리 투자가 주로 미국, 유럽에서 이뤄지고 있어 미국의 IRA(인플레이션 감축법) 등 대중(對中) 규제 덕도 보고 있다. 신석환 대신증권(003540) 연구원은 “국내 배터리 장비사의 수주는 내년까지 폭발적인 증가할 것”이라며 “장비업체들은 대규모 수주에 대응하기 위해 생산능력 확보에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