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울산 울주군 고려아연(010130) 온산제련소 1공장. 아연 전해 공정에 들어서자, 전해조(전기 분해를 하는 장치)에 빽빽하게 담겨 있는 음극판이 눈에 띄었다. 전기 분해를 거치자 음극판에 아연이 붙었다. 음극판에서 떼어낸 아연은 주조공정으로 옮겨졌다.

500℃의 용해로에서 녹인 아연이 달궈진 틀로 쏟아진 뒤 굳으면, 아연괴가 만들어진다. 붕어빵을 만드는 과정과 비슷했다. 고려아연 온산제련소에선 아연을 비롯해 연(납), 동(구리), 금, 은 등 연간 100만톤(t)이 넘는 비철금속이 탄생한다. 세계 최대 규모다.

온산제련소 도로 건너편에는 골조 공사가 한창이었다. 크레인이 연신 자재를 날랐다. 한국전구체의 전구체 공장 건설 현장이었다. 고려아연의 자회사 켐코(KEMCO)와 LG화학(051910)은 지난해 합작법인 한국전구체를 설립했다. 전구체는 니켈, 코발트, 망간 등을 섞어 만든 화합물로 2차전지 핵심 소재인 양극재를 만드는 데 쓰인다.

한국전구체는 2200억원을 들여 공장을 짓고, 연간 최대 2만t의 전구체를 생산할 계획이다. 전구체 2만t은 전기차 약 30만대 분이다. 현재 공사 진행률은 40% 수준으로, 연내 완공해 2024년 1월부터 시험 운전하는 것이 목표다.

지난 4일 울산 울주군 고려아연 온산제련소 1공장 전해공정에 음극판이 전해조에 빽빽이 들어차 있다. /권오은 기자

고려아연이 2차전지 소재를 중심으로 사업 확장에 속도를 내고 있다. 온산제련소가 그 무대다. 고려아연은 온산제련소 주변에 조(兆) 단위 투자를 이어가며 2차전지 양·음극재에 쓰이는 황산니켈과 전구체, 동박 생산 설비를 갖추고 있다. 2차전지 기업들의 해외 현지 생산에 발맞춰 해외 사업장도 검토 중이다.

고려아연 온산제련소 3공장 맞은편에는 케이잼(KZAM)이 자리 잡고 있다. 케이잼은 고려아연의 100% 자회사로 2차전지 음극재 소재인 동박을 만든다. 케이잼은 1500여억원을 들여 연산 1만3000t 규모의 동박 공장을 지었다. 전기차 약 30만대를 만들 수 있는 양이다. 현재 고객사의 품질 인증을 받고 있다. 오는 10월에 인증 절차를 마치고 양산에 나서는 것이 목표다.

아직 본격적인 상업 생산 전이지만 케이잼은 지난달부터 약 2500억원을 들여 1차 증설 공사에 나섰다. 케이잼 공장 바로 옆 부지에 땅을 고르게 하는 정지 작업이 끝난 상태였다. 2025년 1차 증설이 마무리되면 케이잼의 생산능력은 연간 3만t으로 늘어난다. 케이잼은 추가 투자도 검토하고 있다. 1차 증설 부지 옆에 연산 3만t 규모의 2차 증설을 곧바로 이어가는 방안과 해외사업장을 신설하는 방안을 두고 저울질하고 있다.

허균 케이잼 대표는 “규모의 경제를 위해 생산능력을 연산 10만t까지 확대하는 것이 목표”라며 “국내 추가 증설과 해외사업장 신설 중 무엇을 우선 진행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해외사업장은 미주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를 두고 검토 중”이라며 “우선 이달 말까지 해외 사업장 후보지 숏 리스트(Short List·적격 후보군)를 정하려고 한다”고 했다.

고려아연의 동박 제조 자회사 케이잼(KZAM)에서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고려아연 제공

케이잼의 특징은 동 정광(精鑛·불순물을 1차 제거한 광석)을 쓰지 않고 동박을 만든다는 점이다. 대신 고려아연 온산제련소에서 아연이나 연을 제련하면서 나오는 동과 폐인쇄회로기판(PCB)을 재활용한 동을 사용한다. 아연과 연 정광은 동을 1~2%가량 함유하고 있다. 현재 온산제련소는 동을 연간 최대 3만t 생산할 수 있는데, 케이잼 확장에 맞춰 생산능력을 연간 4만t으로 키우고 있다.

한국전구체 역시 전구체 공장과 함께 재활용 공장을 짓고 있다. 재활용 공장에서 연간 6000t의 폐배터리를 처리해 전구체 원료로 사용할 계획이다. 리튬과 같은 부가 원료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국전구체 사내이사를 겸하는 허균 대표는 “전구체 원료의 20%가량을 리사이클링(재활용)으로 조달하려 한다”며 “중국산 전구체와 가격 경쟁력을 갖추려면 리사이클링이 필수”라고 말했다.

지난 4일 울산 울주군 고려아연 온산제련소 인근에 한국전구체 공장이 지어지고 있다. /권오은 기자

고려아연 온산제련소와 300여m 떨어진 켐코 공장에선 이날 황산니켈을 생산 중이었다. 켐코는 전구체 원료인 황산니켈을 연간 최대 10만t 만들 수 있다. 생산능력에 비해 공장 크기(약 6600㎡)는 커 보이지 않았다. 직원 수도 60여명에 불과하다.

비결은 속도였다. 켐코 공장에선 높은 통 모양의 반응기가 5개 있었다. 반응기 4기에선 각각 원료를 녹이는 용해 작업이 이뤄진다. 22시간가량 걸린다. 반응기 1기에선 1시간 동안 불순물을 걸러내는 정제 작업을 진행한다. 다른 황산니켈 공장은 시간이 2배 가까이 걸리는 공정들이다. 켐코는 니켈 순도가 99% 이상이고, 평균 입자 크기가 100㎛(마이크로미터·0.001㎜) 미만인 니켈 파우더(Powder·분말)를 사용하고, 황산 농도를 높여 조업 시간을 단축했다.

정제를 마친 황산니켈 용해액은 다시 한번 잔여물을 걸러낸 뒤 수분을 날리는 증발기에 들어간다. 이어 결정화기에서 과포화 상태를 만들어 모래 알갱이 같은 황산니켈 결정을 만든다. 다시 탈수와 건조 과정을 거쳐 포장까지 마치면 출고 준비가 끝난다. 이태경 켐코 공장장은 “생산한 황산니켈 대부분을 일본 전구체 기업에 수출한다”고 말했다.

고려아연은 온산제련소 인근에 니켈 제련소를 세우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이른바 ‘커스텀(맞춤형) 니켈 제련소’다. 고려아연은 건·습식 융합 공정(Pyro-hydro process)을 통해 니켈 정광부터 니켈 매트(Matte·니켈 함량 70~75%), 산화광의 MHP(니켈 수산화 침전물) 등 모든 니켈을 함유한 원료를 처리·가공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출 계획이다. 니켈 제련소가 현실화하면 고려아연의 온산제련소 인근에 2차전지 소재 관련 투자 규모는 2조원을 넘어설 전망이다.

지난 4일 울산 울주군 고려아연의 자회사 켐코의 보관창고에 황산니켈이 쌓여 있다. /권오은 기자

1974년 문을 연 고려아연은 창사 50주년을 앞두고 있다. 고려아연은 앞으로의 50년을 위해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주도로 신사업을 육성하는 ‘트로이카 드라이브(Troika Drive)’ 전략을 이어가고 있다. 2차전지 소재와 재생에너지·수소, 자원순환 사업을 키우는 것이 골자다.

긴 시간 고도화한 제련 기술은 2차전지 소재 사업의 밑바탕이 됐다. 아연 전해 공정에서 쌓은 전해 기술을 응용해 케이잼의 동박 생산 공정에 접목했고, 제련 과정에서 불순물 제거 기술을 켐코의 황산니켈 공정에 반영했다.

사업 확장은 생존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고려아연 온산제련소에서 생산하는 연의 최대 수요처는 납축전지 제조사다. 납축전지는 주로 내연기관차에 쓰인다. 리튬이온전지를 많이 쓰는 전기차로 전환이 빨라질수록 납축전지가 설 자리가 좁아지고, 그만큼 연 수요도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최윤범 회장은 최근 발간한 ‘2022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통해 “핵심 광물을 더 깨끗한 에너지로 생산하고 폐기물을 활용하는 친환경적 생산 기반을 구축해 인류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해지는 여정을 멈추지 않겠다”며 “오늘을 제련해 새로운 내일의 가치를 만들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