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Portland) 벅먼의 한 거리. 목재 가구 상점과 건자재 상점이 즐비한 곳에 포틀랜드 ‘3대 커피’로 불리는 ‘코아바 커피(Coava coffee roaters)’가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카페에 들어서자 이목을 끈 것은 다름 아닌 목재 가구였다. 이곳은 대나무 소재 스타트업 ‘밤부레볼루션(Bamboo Revolution)’의 작업장 겸 쇼룸이지만, 한켠에 공간을 내어준 카페가 유명해지면서 하루 수백명이 찾는 명소가 됐다.
마이크 풀렌 밤부레볼루션 대표는 “코아바 커피 이외에도 영상 관련 사업과 레이저 조각을 하는 여러 작은 기업들과 공간을 함께 쓰고 있다”며 “방문객들은 커피를 마시러 와서 우리의 작업물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가끔 구매로 이어지기도 한다. 서로 대가 없이 도움을 주고 받은 덕분에 이런 인연이 겹쳐 조던 프로젝트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우연은 사업 초기에도 있었다. 풀렌 대표는 누군가로부터 인근 지역에 70년째 방치돼 버려질 예정인 대나무숲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땅 주인은 그에게 대나무 300그루를 무료로 제공해 오리건으로 옮겨 심을 수 있게 했고, 2년 만에 오리건 대나무 숲은 크기가 두 배가 됐다. 그 덕에 밤부레볼루션은 미국에서 목재용 대나무를 직접 길러 사용하는 최초의 회사가 됐다.
‘힙스터(유행을 좇지 않고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따르는 부류)의 도시’ 포틀랜드가 강소 창업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다양성을 사랑하는 ‘Keep Portland Weird(포틀랜드를 별난 채로 두어라)’ 문화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창업이 이어지고, 이에 대한 지역민들의 애정과 기관·단체 등의 충분한 지원 덕에 포틀랜드는 ‘미국 로컬 비즈니스’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고 있다.
글로벌 스타트업 생태계 연구센터 ‘스타트업블링크’에 따르면 올해 포틀랜드의 스타트업 생태계는 북미 지역 500개 도시 가운데 23위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포틀랜드 지역의 소규모 산업은 미국 381개 도시 가운데 20번째로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 덕에 포틀랜드는 2008년 이후 미국에서 가장 빠른 국내 총생산(GDP) 성장을 이뤄낸 것으로 조사됐다.
나이키, 애플, 삼성, LG(003550) 등의 제품 혁신을 돕고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디자인기업 지바(Ziba)의 소랍 보쉬기 최고경영자(CEO)도 이 매력에 이끌려 42년 전 포틀랜드로 이주해 회사를 세웠다. 그는 포틀랜드를 택한 이유로 ‘혁신성을 기반으로 한 장인정신’을 꼽았다.
그는 “이곳 사람들은 남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한다. 장인이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봐’라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며 “지역민들 뿐만 아니라 이 도시 자체도 다른 도시처럼 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대형 브랜드를 유치하려 애쓰기보다는 지역 내 작은 기업들을 지원하는 데 더 관심이 있다. 그 덕에 이곳의 창업가들은 자신만의 것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산업디자인, 산업 트렌드 분야 권위자인 그는 실제로 이 분야 초기 창업가들에게 대가 없이 컨설팅을 해주곤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 여성이 찾아와 도움을 요청해 함께 제품을 연구해 개발하고 현재 시제품을 제작하고 있다. 그가 할 일은 그저 제품 목표를 세우고 영업과 마케팅을 위한 자금을 모으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보쉬기 대표는 사내 벤처를 육성하는 ‘지바랩스(ZibaLabs)’도 함께 운영 중이다. 그는 “직원들이 넘쳐나는 아이디어를 사업화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재무 담당, 스튜디오 감독, 사업 개발자 등 직군과 관계 없이 아이디어만 있다면 시도할 수 있다”며 “옆에서 지켜보면 기업가로서 부족한 면모가 종종 보이지만 이들이 성장할 수 있게끔 지원하는 것이 나의 할 일”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증시 상장이나 스케일업(규모를 키우는 것)은 포틀랜드의 기업과 거리가 먼 단어다. 규모가 작으면 작은 대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지속할 수 있는 곳이라고 이곳 사람들은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풀렌 대표는 “포틀랜드에서 창업을 한 건 ‘제2의 무엇’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이곳의 문화와 멘토링 프로그램, 정부기관과 지방 은행의 자금 지원이 스타트업 생태계를 지속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대가 없이 밀어주고 끌어주는 스타트업 커뮤니티 덕분에 기술창업의 성지로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또다른 소도시가 있다. 미국 콜로라도주 로키산맥 아래 인구 10만명의 작은 도시 ‘볼더(Boulder)’다. 미국 최대의 액셀러레이터(AC) ‘테크스타(Techstars)’는 조건 없이 먼저 돕는 볼더의 ‘Give First (먼저 베풀기)’ 문화에 주목했다.
볼더 창업 생태계에서 27년간 몸담은 콜로라도대 창업원 ‘데밍 센터’의 에릭 무엘 교수는 “볼더의 문화는 놀랄 만큼 협조적(supportive)이다. 기업가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누구든 흔쾌히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7년 전 볼더에 처음 와서 사업을 할 때 인사 매뉴얼을 만들어야 했는데, 한 동료 사업가가 아무 대가 없이 이를 전부 무료로 제공한 적이 있다. 혼자 하려면 1만달러(약 1300만원)는 들었을 것”이라며 “창업은 외롭고 도전적인 길이다. 하지만 창업가끼리 서로 연결돼 서로 돕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고 말했다.
테크스타는 이 문화를 AC에 적용했다. 창업 팀을 선발해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데이비드 코헨 테크스타 공동 창립자는 “현재 17개국 50개 도시에서 AC프로그램을 운영 중인데, 우리는 초기 투자금만 지원하는 것이 라니라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해 사업 개발까지 지원하고 있다”며 “먼저 베풀기 문화가 완벽한 선순환 구조를 그리고 있다. 창업 팀이 커뮤니티의 도움을 받아 성장하고 나면 다시 돌아와 다른 초기 창업 팀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는다. 자신들이 투자한 팀인지, 투자할 팀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여기다 볼더는 거주민의 30%가 학생과 교직원이며 63%가 학사학위 이상을 취득한 고학력 도시다. 미국 명문대인 콜로라도대와 더불어 NIST(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를 비롯한 십여개의 정부 출연 연구소가 있어 미국에서 가장 기술집약적인 도시로 꼽힌다. 학교와 연구기관이 창업에 우호적이고 산학연 연계가 긴밀한 것도 창업 열기를 견인하고 있다. 그 덕분에 볼더는 석유나 천연가스 등 자원과 거대 산업의 도움 없이 1인당 GDP 7만달러(약 9300만원)로 미국 내 11위를 기록했다. 2019년 기준 7만5000달러 선인 뉴욕과 비슷하고, 4500만원 수준인 서울의 배가 넘는다.
테크스타 AC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인도에서 볼더 인근인 덴버로 이주해 창업한 스타트업 ‘코멧챗(CometChat)’은 “큰 도시로 옮기지 않고 이곳에 남아있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CB인사이트에 따르면 3분기 미국 지역별 벤처 투자는 실리콘밸리와 뉴욕을 포함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전년 대비 60% 이상 감소했으나 덴버는 16% 감소에 그쳤다.
다니엘 미츠너 최고마케팅책임자(CMO)는 “이곳엔 엔젤투자부터 대형 벤처까지 다양한 투자자들이 있다. 이곳의 성장 잠재력은 엄청나다고 생각한다”며 “테크스타 출신 유니콘 기업인 센드그리드(Sendgrid) 재직 당시에는 개발자들에게 이곳의 장점을 알리려 6개 스타트업이 함께 광고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도 쭉 덴버에 남아있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당연히 그렇다”며 “내년 시리즈B 투자를 받고 앞으로 후속 투자를 받는 과정에서도 본사를 대기업으로 옮기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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