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태 카이스트(KAIST·한국과학기술원) 창업원장은 ‘우연한 발명’을 뜻하는 ‘세렌디피티(serendipity)’에 혁신의 미래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시간이 지나니 책상에 엎지른 당근주스가 반짝이는 걸 본 연구자가 이를 무심히 넘기지 않고 당근의 성분을 연구하기 시작해 LCD 액정이 탄생한 것”이라며 “이런 세렌디피티가 일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중소벤처기업부의 민간투자 주도형 기술창업 지원 프로그램인 ‘팁스(TIPS)’를 기획했다. 팁스는 정부가 경쟁 입찰 방식으로 엔젤투자사, 엑셀러레이터(AC·창업기획자), 초기투자 벤처캐피탈(VC), 대기업 등을 운영사로 선정해 유망한 스타트업에 투자하게 하고 정부는 연구개발(R&D) 지원금과 사업화, 판로 개척을 후속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서울과 대전에 창업 네트워킹 공간인 ‘팁스 타운’도 조성해 운영하고 있다.
2013년부터 지난해 10월까지 총 1442개 기업이 팁스 사업에 선정돼 국내외 민간 기업이 5조8000여억원을 투자했고 정부가 6000억원의 연구개발비와 1400억원의 사업화·마케팅비를 지원했다. 1442개 스타트업은 총 1만1443명의 일자리를 만들어냈다. 이 가운데 6개사가 기업공개(IPO)를, 34개사가 인수합병(M&A)을 해 투자금을 회수했다. 김 원장을 대전 유성구 카이스트 창업원에서 만났다.
-‘팁스의 아버지’로 불린다. 이력을 소개해달라.
“1998년 중소기업청 창업지원과 사무관으로 시작해 올해로 25년째 스타트업·투자업계에 몸담고 있다. 대학 창업보육센터 지원업무로 일을 시작했고, 미국 일리노이 공대로 유학을 가 금융 공부를 했다. 복귀해서는 제도의 혜택을 받아 증권사에 파견을 갔다. 2007년 5월에 나갔는데 이듬해 2월에 리먼사태가 터졌다. 국내에는 10월부터 여파가 오기 시작했는데 2000 선이던 코스피가 1000 아래까지 떨어지더라. 1년여 사이에 그 질곡을 다 봤다.
투자업계 생태계를 공부하는 와중에 금융위기가 닥쳐 자본시장이 출렁이는 것을 보면서 많은 통찰을 얻었다. 다시 중기청으로 복귀한 뒤에는 모태펀드를 관리하며 벤처펀드 1조원 시대를 맞았다. 이후 2011년 말, 이스라엘에 2년간 파견을 갔고 2012년 1분기 보고서로 ‘팁스’를 냈다. 팁스가 만들어지고 자리잡힌 뒤에는 정책과장, 기술혁신정책관을 역임하며 중소기업 R&D 정책을 총괄했다. 어쩌다 보니 스타트업 생태계의 주요 플레이어들과의 접점을 넓히며 인생을 살아왔다.”
-이스라엘에서 어떤 배움을 얻었나.
“그동안 정부가 해오던 기조와 정반대의 철학을 가지고도 더 크게 성공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한국은 1990년대 말 벤처법이 만들어지고 코스닥 시장이 열리면서 본격적으로 스타트업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2011년 당시엔 정부가 스타트업을 키우겠다고 천명한 지 15~16년이 지난 시기였는데도 여전히 모든 것이 정부 주도로 이뤄지고 있었다. 시장 중심으로 스타트업 생태계를 활성화할 방법에 대해 정부별로 지향점이 많이 제시됐지만, 실제로 어떻게 실행에 옮길까에 대한 고민이 많던 시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에 나가 보니 한국과 정반대로 가고 있었다. 이스라엘 정부가 1993년 시작한 스타트업 육성 정책 중 하나인 ‘기술창업보육센터 프로그램(TI)’이 해법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한국은 정부가 먼저 스타트업에 R&D를 지원하면 시장이 후속투자를 하는 기조였다. 그러나 TI는 시장에서 먼저 스타트업을 선별해 투자하면 정부가 과감히 후속 지원을 하는 모델이었다. 정부 주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해 이를 벤치마킹해 팁스를 기획했다.”
-카이스트에서는 어떤 지원을 하고 있나.
“의도하지 않은 우연이나, 혁신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겪는 시행착오가 창업 과정에 접목될 수 있도록 하는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올해 초에 시작한 ‘룬샷 스타트 챌린지’가 있다. 룬샷(loonshot)은 황당하고 터무니없지만 결국 혁신을 만들어내는 아이디어를 말한다. 누구나 박수치고 인정하는 ‘문샷(moonshot)’의 반대 개념이다. 룬샷 스타트 챌린지는 ‘아무 생각이나 좋으니 남의 시선을 두려워 하지 말고 드러내보라’는 취지다. 적게는 30만원부터 많게는 300만원까지 지원한다. 꼭 실제 창업으로 이어지지 않아도 된다.
아이디어 수준을 넘어 실제 창업을 준비하는 예비 창업가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있다. ‘이 파이브(E5)’라는 창업 경쟁 프로그램이다. 3개월정도 진행을 하는데 40~50팀 정도 신청을 받아 12개 팀을 선발하고 그 중 6개 팀에 상금을 수여한다. 단순히 경쟁만 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계별로 깊이 있게 교육도 한다. 교육과 선발을 반복적으로 거치고 나면 눈부시게 성장해 있다. AC나 VC로부터 투자도 굉장히 잘 받는다.
해외 AC와의 협업으로 글로벌 네트워크도 구축 중에 있다. 창업자 네트워킹은 학생 차원에서 머물러서 될 일이 아니다. 창업자라면 교수와 학생을 막론하고 학교 외부 사람들과도 더 섞여야 세렌디피티가 일어나고 협력할 수 있다. 여기다 전문가들, 특히 투자자와 글로벌 투자은행(IB)까지 섞이며 그룹을 키워가야 한다.”
-정리하자면 ‘바텀 업(Bottom-up)’ 방식의 생태계여야 지속 가능하다고 보는 것인가.
“그렇다. 지금껏 한국식 모델은 정부가 산업을 선도하는 ‘톱 다운(Top-down)’ 방식이었다. 물론 정부가 직접 나서기 때문에 발전 속도가 굉장히 빠른 점은 장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얼마나 지속 가능하냐는 것이다. 그간의 정부 노력이 부족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노력의 방향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지금의 스타트업 생태계는 자율적이라기보다 타율적인 생태계다. 이 차이는 대형 위기가 닥쳤을 때 극명히 드러난다. 똑같이 타격을 받더라도 자율적인 생태계는 회복 탄력성이 좋다. 시장 원리에 따라 자원이 효율적으로 분배되기 때문에 위기가 왔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타율적인 생태계는 회복 탄력성이 떨어진다. 위기이든 기회이든 늘 정부가 다방면에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주지 않으면 생태계가 굉장히 불안해진다. 그동안은 우리가 불가피하게 정부 주도의 발전을 해왔지만 이제는 자생력을 키워줘야 할 때다. 해외 같은 경우엔 일몰제를 적용해 정부 개입의 기한을 정해놓기도 한다. 시장에 ‘정부의 역할은 여기까지다’라는 신호를 준 뒤 ‘히트 앤드 런(Hit and run)’, 치고 빠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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