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한림읍 금능에 위치한 한 공업단지. 회색빛 공장들 틈으로 제주 바다와 오름을 형상화한 에메랄드색 로고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곳은 제주 지역 기반 수제맥주 브랜드 ‘제주맥주’의 양조장. 내부로 들어서니 건물 한 층 높이를 훌쩍 뛰어넘는 맥주 탱크들이 줄지어 있었다. 보관탱크 1개당 용량은 20만리터(ℓ)로, 캔맥주 5만캔 분량이다. 매일 한 캔씩 마신다면 137년동안 마실 수 있다.

제주맥주는 연간 2000만ℓ의 맥주를 생산하고 있는데, 2020년 기준 국내 수제맥주 시장에서 가장 큰 규모다. 제주에서 직접 배양한 효모와 제주산 감귤껍질 등 현지 재료가 쓰였다. 제품 이름에도 ‘거멍(검다)’, ‘펠롱(반짝)’ 등 제주 말을 담았다. 현재 112개국에 수출하고 있으며 2021년 전년 대비 매출 2.5배 성장을 기록했다. 같은 해 5월엔 ‘1호 수제맥주 상장사’로 코스닥에 진입에 성공했다.

문혁기 대표가 ‘제주’를 브랜드 정체성으로 택한 이유는 국내 최대 관광지로서의 존재감 때문이다. 제주맥주 관계자는 “제주를 찾는 사람들은 이 지역만의 고유한 매력에 이끌려 온다. 이 점이 지역 기반의 혁신성을 가지고 고객과 소통하는 수제맥주의 철학과 잘 맞아떨어진다고 봤다”며 “제주의 가치를 알리는 것이 곧 브랜드 가치를 알리는 것이기 때문에 제주맥주는 제주도 홍보대사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고 말했다.

제주 한림읍 금능농공단지에 위치한 제주맥주의 양조장. 양조장 내부가 내려다 보이는 3층 펍에서는 가장 신선한 제주맥주를 맛볼 수 있다. /제주=이은영 기자
제주 한림읍 금능농공단지에 위치함 제주맥주 양조장 내부. 이곳 양조장에는 발효탱크 24개와 보관탱크 48개가 있다. 2020년 기준 국내 최대 수제맥주 생산량을 기록했다. /제주맥주 제공

제주의 스타트업 생태계가 깨어나고 있다. 불과 6~7년 전까지만 해도 제주는 스타트업 불모지로 여겨졌지만, 최근 들어 제주에서 기회를 포착한 창업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통계청이 공개한 최근 5년 지역별 인구 수와 창업기업 수를 보면, 제주의 인구 대비 창업기업 수는 전국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보였다. 제주 소재 기업 3곳 중 1곳 이상은 창업기업으로 나타났다.

국내 최장수 엑셀러레이터(AC·창업기획자) 크립톤의 양경준 대표는 “젊은 창업가들의 특징은 살기 좋고 놀기 좋은 곳에서 창업도 한다는 것”이라며 “이주민의 창업이 활발해지면서 제주의 창업 생태계도 눈에 띄게 활발해지고 있다. 특히 제주의 자원을 활용하려는 경향이 뚜렷하다”고 말했다.

그래픽=이은현

창업가들은 제주를 택한 이유로 ‘제주다움’을 꼽았다. 무동력 레이싱파크 ‘9.81 파크’를 운영하고 있는 모노리스의 김종석 대표는 “자연과 어울리면서 동시에 레이싱의 스릴도 느끼는, 제주에서의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9.81파크의 기획 의도”라며 “사업을 기획할 때부터 철저하게 제주를 담으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9.81파크는 한라산을 등진 채 협재 앞바다와 비양도가 보이는 자연 오름에 테마파크를 조성해 제주 ‘핫 플레이스’로 떠올랐다. 그는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은 제주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을 하러 온다”며 “9.81파크가 고객들의 사랑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아주 ‘제주도다운’ 콘텐츠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기술기업들에게도 제주는 기회의 장이다. 전정환 전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장은 “테크 스타트업들이 제주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의외로 많다”며 “먼저 신재생 에너지 분야가 있다. 오랫동안 제주에서 계속 투자해 왔고, 국내에 제주만큼 신재생 에너지 이용이 활발한 지역이 없다”고 했다. 이어 “섬이기 때문에 우주산업의 최적지이기도 하고, 해양 관련 산업도 가능하다”며 “오름과 구불구불한 산길이 많고 기후가 변화무쌍해 자율주행 등 모빌리티 산업의 훌륭한 테스트 베드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제각기 제주여야만 하는 이유를 가지고 이곳에서 창업을 하기 때문에, 제주 스타트업들은 유독 지역에 대한 애정이 강하다. 제주 출신이든 이주민이든 다 똑같다”며 “이 점은 제주만의 굉장한 강점”이라고 말했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남성준 다자요 대표, 김종석 모노리스 대표, 윤형준 제주패스 대표, 오제원 제주맥주 팀장. /제주=신소현 PD

제주를 찾는 창업가들의 발걸음이 지역의 새 성장동력이 될 수 있도록 기관들의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제주관광공사는 지난 2018년부터 ‘J 스타트업’ 사업을 진행 중이다. 제주관광공사 관광산업혁신그룹의 강문석 차장은 “과거 다른 정부기관의 관광 스타트업 지원 현황을 봤는데, 90%가량이 수도권에 쏠려 있었다. 제주 기업은 지원 대상에 들지 못한 때도 있었다”며 “제주는 국내 최대 관광도시이고 뛰어난 사업모델을 가진 기업들도 많은데 소외되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고 나서 직접 지원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공사는 단순 투자를 넘어, 자체 네트워크와 마케팅 채널을 활용한 판로 개척을 지원하고 있다. 후속 마케팅 지원도 3년 6개월간 제공한다. 그간 공사는 제주 지역에 뿌리를 둔 관광 혁신기업 23개를 키워냈다. 207명의 일자리가 만들어졌고, 이 기업들은 벤처캐피탈(VC)등으로부터 총 53억3000만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2015년에 문을 연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제주창경)는 이주민 창업가와 지역사회의 연결고리를 잇는 데 주력했다. 전정환 전 센터장은 “2015년 처음 창경 일을 시작했을 당시, 이주민들과 지역민이 서로 섞이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다. 생태계를 깨우려면 커뮤니티를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첫 2년 간은 네트워킹을 위해 힘썼다”고 말했다.

이후 제주스타트업협회(JSA)가 만들어지며 바통을 이어받았고 제주창경은 직접 투자에 뛰어들었다. 제주창경의 보육기업은 이달 기준 273개사다. 이들 가운데 75개사가 총 1956억원이 넘는 투자를 받았다. 창경이 직접 초기비용을 투자한 24개사는 지난달까지 총 818억원의 투자를 추가로 유치했다.

제주 스타트업 캐플릭스가 지난 8월 개소한 해안도로 워케이션센터. /제주=이은영 기자

하지만 여전히 어려움도 많다. 제주의 매력에 빠진 창업가와 개발자들의 이주가 활발해지고 있고 워케이션(일과 휴가를 함께 한다는 뜻의 신조어) 트렌드가 번지면서 제주에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고 있지만, 창업가들은 투자 유치와 인재 수급에 난항을 겪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남성준 다자요 대표 겸 JSA 회장은 “많은 제주의 창업가들이 투자와 협업을 위해 일주일의 절반을 서울에서 보낸다. 제주는 3년째 지역 펀드가 하나도 없는 상황”이라며 “서울이 구청 단위에서도 펀드를 만들고 있는 것에 비하면 매우 열악하다”고 말했다.

JSA 초대 회장을 지낸 캐플릭스의 윤형준 대표는 “스타트업이 잘 되기 위해선 인재, 자본, 기회가 필요한데 제주에는 기회는 많지만 인재와 자본이 매우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는 “좋은 인재가 있으면 사업 기회를 창출하고 사업모델도 만들고 돈도 끌어올 수 있다”며 “그런데 대부분의 인재를 서울에서 데려와야 하다 보니 제약이 많다. 회사 직원 중 90%가량이 이주민”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아직 정부와 지자체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김종석 모노리스 대표는 “제주로 이주해 일하는 것에 대한 선호는 높다. 그래서 숙소나 출퇴근을 지원해주면 만족해 하면서 오는 경우가 많다”며 “그런데 갓 창업한 스타트업들이 이런 비용을 어떻게 지불하겠나. 제주 지역 인재 개발과 함께 이같은 채용 지원 프로그램을 정부나 지자체에서 적극적으로 운영해주면 생태계가 활성화 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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