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 전 아들과 딸을 불러 진지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내 역할은 끝났다고.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여기를 떠날 것입니다.” 2013년 미국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 창업주 겸 회장인 이본 쉬나드(Yvon Chouinard)를 만나 후계 구도를 물었을 때 그가 한 답이다. 약 10년 전 취재 수첩을 다시 꺼내 본 것은 쉬나드 회장의 놀라운 공개 편지 때문이었다.
최근 쉬나드 회장은 ‘지구가 우리의 유일한 주주(Earth is now our only shareholder)’라는 공개 편지를 통해 자신과 가족이 보유한 4조원 규모의 회사 지분을 기업 가치와 임무를 보호하기 위해 창립한 재단과 비영리 단체에 모두 넘겼다고 밝혔다.
기자가 인터뷰한 시점은 2013년 10월 22일. 10년 만에 후계 구도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들은 셈이었다. 쉬나드 회장은 회사를 기부하는 방법을 두고 오랫동안 전문가와 상의해 온 것으로 보인다. 내년은 파타고니아 창립 50주년. 쉬나드 회장이 자신의 결심을 실행에 옮길 최고의 타이밍이다.
파타고니아는 세 개의 바퀴로 굴러간다
쉬나드 일가의 기부 방식은 조금 독특하다. 우선, 쉬나드 일가는 의결권이 있는 파타고니아 주식(주식의 2%)은 ‘파타고니아 퍼포스 트러스트(Patagonia Purpose Trust)’로 이전했다. 이 트러스트는 파타고니아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설립된 일종의 재단이다. 의결권이 없는 주식(주식의 98%)은 환경 위기에 대처하고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된 비영리 단체 ‘홀드퍼스트 컬렉티브(Holdfast Collective)’로 넘겼다.
이제 파타고니아는 세 개의 바퀴로 굴러간다. 영리 기업인 파타고니아, 이사회 멤버 교체와 회사 정관 변경 등의 권한이 있는 파타고니아 퍼포스 트러스트, 연간 약 1억달러(약 1410억원)의 배당금을 받지만 파타고니아 경영에는 참여할 수 없는 비영리 기업인 홀드퍼스트 컬렉티브다. 2019년 파타고니아는 기업 사명을 ‘우리의 터전, 지구를 되살리기 위해 사업을 한다’고 간명하게 다듬었다. 이 역시 쉬나드 회장의 구상을 더욱 구체화할 사전 정지 작업이었다.
쉬나드 회장은 편지에서 “회사가 추구하는 가치를 유지하면서 지구 환경 위기를 막기 위한 싸움에 더 많은 돈을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는데, 솔직히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면서 “그래서 우리만의 방법을 새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파타고니아가 공개 기업(going public)이 되는 대신 ‘목적 기업(going purpose)’이 되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20세기 기부 vs 21세기 기부
파타고니아 일가의 독특한 기부 구조를 이해하려면 미국 세법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미국은 501(c) (3), 501(c) (4) 두 가지 유형의 비영리 단체에 세금을 면제하거나 우대해준다. 제한된 로비 활동을 할 수 있는 501(c) (3) 유형의 비영리 단체에 대한 기부는 세금이 면제되지만, 무제한 로비가 가능한 501(c) (4) 유형의 비영리 단체에 대한 기부는 낮은 세율의 세금을 내야 한다. 파타고니아가 만든 비영리 단체는 501(c) (4) 유형이다.
회사를 통째로 기부하겠다는 파타고니아 발표는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뉴욕타임스(NYT) 파타고니아 담당 기자는 “21세기 문제를 20세기 기부 방식으로는 풀 수 없다”며 파타고니아의 기부 방식을 극찬했다. 20세기 기부 방식이 대학에 부호의 이름을 붙인 빌딩을 세우는 것이라면, 파타고니아 식의 기부는 기후 변화라는 실존적 위협에 맞서 법률 제정 등 정치적 압력을 가하는 21세기 방식이라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501(c) (4) 유형의 비영리 단체는 로비가 가능하다.
포브스는 비즈니스 윤리 전문가인 제임스 오툴(James O’Toole‧'깨어있는 자본주의자’ 저자)의 말을 인용, “창업가가 떠나거나 통제력을 잃은 이후에는 회사가 초기 목적을 잊어버리거나 파산한 경우가 많았다”면서 “쉬나드 일가는 이런 역사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한 것 같다”고 썼다.
쉬나드 일가의 행보를 두고 ‘억만장자의 세금 플레이(tax play)’라는 일각의 비판도 있다. 결과적으로 회사 통제권을 놓지 않으면서 회사를 상속하거나 매각했을 경우 내야 할 약 40%의 세금, 파타고니아의 경우 약 7억달러(약 9768억원)의 세금을 회피했다는 것이다. 파타고니아가 비영리 단체에 비의결권 주식 98%를 넘기면서 낸 세금은 1750만달러(약 244억원) 정도다.
이 비판에는 미국 전자 부품 기업 트립 라이트(Tripp Lite) 소유주 바리 사이드(Barre Seid) 사례가 자주 등장한다. 그는 보수 성향의 정치 로비 단체인 마블 프리덤 트러스트에 회사를 넘겼다. 이 로비 단체는 곧 회사를 매각, 세금 폭탄 없이 16억5000만달러(약 2조3200억원)의 자금을 확보했다. 파타고니아 발표 이후 좌우(左右) 가리지 않고 부자들이 선택하는 합법적인 절세 방법이 ‘자선(philanthropy)’이라는 말이 나온 배경이다. 레이 메이도프 보스턴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부자들이 돈으로 원하는 것을 하도록 정부가 지원해주고 있다”면서 “이것은 나머지 미국인의 부담이며 민주주의 관점에서도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주주 자본주의에서 이해 관계자 자본주의로 변화”
쉬나드 회장은 매출의 1%를 기부하고 ‘필요하지 않다면 이 재킷을 사지 말라’는 광고 캠페인을 벌인 비즈니스계의 이단아다. 기업 공개 계획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노(no), 노(no), 노(no)…, 공개 기업이 책임 기업이 되는 길은 없다”고도 했다.
파타고니아 설립은 이윤보다 가치를 앞세우는 기업을 일구는 첫 번째 거대한 실험이었다. 이제 창업자가 떠나더라도 가치를 지켜내는 기업 운영이 가능한지를 따져보는 파타고니아의 두 번째 거대한 실험이 시작됐다.
쉬나드 회장은 인터뷰에서 “소수의 부유한 사람들과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로 귀결되는 자본주의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를 만드는 데 파타고니아의 지배구조 개편이 도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가 바란 대로 된다면, 주주 이윤 극대화에 집착하는 미국식 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가 주주·종업원·협력사·지역사회 등 다양한 이해 관계자를 고려하는 이해 관계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로 변화하는 데 영향을 줄 것이다. 새로운 자본주의가 등장할지, 만에 하나 비판자들의 말대로 세금 회피로 끝날지에 귀추가 주목된다. 세 개 바퀴로 굴러가는 파타고니아의 행보에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Plus Point
대장장이 암벽가 이본 쉬나드
2년 동안 주한 미군으로 근무
파타고니아 설립자 이본 쉬나드는 한국과 인연이 깊다. 1960년대 주한 미군으로 2년간 근무하던 쉬나드는 선우중옥씨와 북한산 바윗길를 개척했다. 암벽 등반가들 사이에서는 쉬나드(취나드) A, B루트로 불리는 길이다. 선우씨는 훗날 파타고니아에서 근무하게 된다. 쉬나드가 쓴 책 ‘파타고니아,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에도 선우씨가 찍은 사진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캐나다 이민자 집안 출신으로 공부보다는 등반과 낚시를 좋아했던 쉬나드는 암벽 등반 도구를 직접 만들 정도로 손재주가 좋았다. 한국에 있을 때 서울 쌍림동 대장간에서 손수 장비를 만들기도 했다.
전설적인 이 창업가의 길을 따라가 보면 다른 아웃도어 브랜드도 만나게 된다. 등반 장비 회사 블랙다이아몬드의 전신은 쉬나드의 첫 회사인 쉬나드 이큅먼트다. 당시 쉬나드는 등반용 쇠못인 피톤을 바위에 박고 빼는 과정에서 암벽을 훼손하는 것을 보고 매출의 70%를 차지하는 피톤을 포기하고 대신 바위 사이에 끼워 넣어 사용하는 알루미늄 초크를 개발했다. 노스페이스 창업자인 더글러스 톰킨스와 쉬나드는 안데스산맥과 남아메리카를 돈이 떨어질 때까지 여행하던 사이다. 톰킨스는 47세 되던 1989년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내놓고 노스페이스 지분까지 모두 매각했다. 그는 미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칠레로 떠났다. 2015년 칠레 남부 파타고니아(지역명)의 헤네랄 카레라 호수에서 카약을 즐기다 강풍으로 호수에 빠졌고 끝내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