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천미천(川) 근처의 한 조용한 주택가. 오래된 단풍나무와 감나무의 푸른 잎이 우거진 대문으로 들어서니 자갈이 깔린 마당과 ‘ㄱ’자 모양의 옛 가옥의 구조를 갖춘 주황색 지붕 집이 보였다. 이곳은 숙박 공유 스타트업 ‘다자요’가 빈집 재생 프로젝트로 탄생시킨 ‘하천바람집’이다. 1945년에 지어진 이 집은 제주 4·3 사건 때 이곳으로 피신 온 어르신이 살다 빈집이 된 지 10년이 됐다. 다자요가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자금을 모아 리모델링했고 최근 6인용 고급 독채로 탈바꿈했다.

내부로 들어서니 넓은 현관과 뒤뜰 담쟁이넝쿨을 그림처럼 담고 있는 큰 창이 보였다. 이 공간을 기준으로 양쪽에 문이 있고 각 문을 열고 들어서면 거실과 침실이 이어진다. 왼쪽 문으로 들어서니 널따란 거실이 보였다. 거실 중앙에 놓인 좌식 탁자에는 다기 세트가 정갈하게 놓여있었다. 거실 안쪽으로는 화장실이 딸린 침실과 각종 책이 비치된 서재가 있다. 현관 오른쪽 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에는 화장실이, 왼편에는 야외 욕조로 나가는 문이 있다. 오른쪽엔 ‘ㄷ’자 모양의 주방과 식탁, 소파, TV가 놓인 거실이 이어지고 안쪽으로 침실 두 개가 있는 구조다.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에 위치한 다자요의 하천바람집. 현관문을 열고 왼편으로 들어서면 첫 번째 거실과 서재, 침실이 보인다. /이은영 기자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에 위치한 다자요의 하천바람집. 현관문을 열고 오른편으로 들어서면 주방과 거실, 침실 두 개가 이어진다. 벽에 난 창문들 너머로 마당이 보인다. /이은영 기자

하천바람집은 개방감이 특히 눈에 띄었다. 두 개의 거실 모두 마당 방향으로 큰 창이 여러 개 나 있고 모든 방에는 앞마당이나 뒷마당이 보이는 창이 있었다. 두 거실로 향하는 문도 미닫이문이어서 필요에 따라 공간을 분리할 수도, 개방할 수도 있었다.

하천바람집이 호텔이나 펜션과 다른 점은 ‘집 같다’는 데 있다. 가구와 생활용품, 전자기기들이 꼼꼼하게 갖춰져 있어 잘 정돈된 집에 방문한 듯했다. 집주인이 쓰던 고(古) 가구가 남아있었고, 곳곳에 세워진 수납장에는 다기, 커피 드립 세트, 각종 식기도구, 주방용품과 더불어 벌레 퇴치제, 소독제 등 생활용품들이 비치돼 있었다. 제주 스타트업들이 만든 식품들도 냉장고를 채우고 있었다. 공기청정기, 무선 청소기는 물론 로봇청소기도 거실에 놓여 있었다. 일반 숙박업소처럼 상주 직원의 안내를 받을 수는 없지만 태블릿PC에 적힌 안내문을 따른다면 무리 없이 지낼 수 있다.

방문객들의 추천 명소가 적힌 노트와 방명록도 있었다. 방명록에는 하천바람집 리모델링에 참여한 배우 류승룡씨와 더불어 두 딸과 사위, 손주들과 이곳을 찾은 사람, 이곳에서 생일을 맞은 사람 등 여러 방문객의 사연이 담겨 있었다. “제주살이를 하고 싶게 만드는 집이다”, “잠들기 힘든 요즘인데 좋은 잠 자고 간다”, “사흘 내내 날이 흐렸지만 좋았다” 등 정성스러운 후기가 적혀있었다.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에 위치한 다자요의 하천바람집. 거실 한켠에 수십년 된 고(古)가구와 각종 다기가 비치돼 있다. 야외에서 반신욕을 즐길 수 있도록 대형 욕조도 설치돼 있다. /이은영 기자

아쉬운 점도 있었다. 야외 욕조는 4인 이상이 즐기기에 충분할 만큼 넓었지만 작은 수전 한 개가 전부여서 물을 받는 데 1시간 30분 이상이 걸렸다. 또 욕조를 둘러싸고 풀이 자라고 있어 벌레들이 많이 날아들었다. 벌레 퇴치제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주요 관광지와 멀리 떨어진 점도 고려할 점이다. 주변엔 이렇다 할 대중교통 수단이 없고, 늦은 밤이 되면 길이 어두워 보행과 운전에 유의해야 한다. 자차 또는 택시 이동 시 제주공항까지 1시간가량 걸리고 가장 가까운 주요 관광지인 성산까지는 30분가량 소요된다.

77년 된 제주 빈 집이 고급 독채로… ‘다자요’ 하천바람집 가보니

빈집 재생 프로젝트를 기획한 다자요는 제주를 기반으로 하는 7년차 스타트업이다. 은행에서 일하다 10년간 선술집을 운영했다는 남성준 대표가 창업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그는 관광 난개발 되어있는 제주를 보며 대안으로 ‘빈집’을 제시했다. 빈집의 주인으로부터 10년 무상임대를 받아 리모델링 후 숙박 서비스를 제공한다. 하천바람집은 1박에 55만원이다. 크라우드펀딩으로 리모델링 비용을 모으고 여러 기업으로부터 제품을 협찬받아 집을 채웠다.

그러나 빈집을 빌려 공유하는 방식의 사업은 기존에 없던 터라 사업 초기 규제 문제를 겪어야 했다. 농어촌 민박업계와도 첨예하게 대립했다. 한때 ‘한국판 에어비앤비’로 떠오르며 주목받았지만 불법 숙소로 내몰려 지난 2019년 사업을 접어야 했다. 그러다 지난해 규제 샌드박스 실증특례사업으로 선정돼 하천바람집을 시작으로 총 10채의 숙소를 선보이고 있다.

다자요는 사업을 확장해 구독 서비스와 워케이션용 소형 숙소 제공에 나설 예정이다. 남성준 대표는 “월 일정 금액을 내고 다자요 숙소를 구독할 수 있는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다”며 “또 워케이션을 위한 B2B(기업 간 거래) 프로젝트도 준비하고 있다. 지금 제공 중인 독채보다는 작고 가격대가 낮은 1~2인용 숙소를 제공하려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