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1호’ AC인 크립톤의 양경준 대표는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AC는 오늘날 한국의 창업 생태계를 이끈 주역으로 꼽히지만, 이대로는 위험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AC는 기업의 성장을 가속화(Accelerate)하는 창업기획자를 말한다. 초기 스타트업에 자금과 컨설팅 등을 지원하기도 하고 중견기업·대기업의 혁신을 돕기도 한다.

양 대표는 “AC의 본질은 자금 투자가 아닌 밀착 지원에 있다”면서 “창업 생태계가 활발해지면서 AC도 우후죽순 늘어나고 있지만, 조력자 역할보다는 초기 스타트업 투자를 전문으로 하는 ‘마이크로 벤처캐피탈(VC)’ 역할을 하려는 경우가 많다”며 우려했다. 그가 대표로 있는 크립톤은 2000년에 설립된 국내 첫 AC로, 현재 7명의 전담 직원이 60여개의 스타트업을 돕고 있다. 양 대표를 지난 9일 서울역 인근 사무실에서 만났다.

양경준 크립톤 대표가 지난 9일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액셀러레이터(AC)의 위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은영 기자

-크립톤은 국내 최초이자 최장수 AC다.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일하면서 만난 지인의 추천으로 우연히 시작했다. 2000년 8월에 법인을 설립했는데, 당시엔 액셀러레이팅이라는 개념이 들어오기 전이라 ‘경영 컨설팅업’으로 분류가 됐다. 더구나 ‘닷컴버블’이 꺼지던 시기여서 1990년대 후반에 나타난 몇 안 되던 ‘벤처 인큐베이터’도 사라지고 없던 때였다. 이 때문에 2000년대까지만 해도 일하면서 동종업계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그럼에도 20년 넘게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인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걸 공부하는 것을 좋아한다. 기업에 투자를 하려면 그 분야에 대해 깊게 공부해야 하는데 그 일이 괴롭지 않고 오히려 즐겁다. 그리고 창업 취지와도 잘 맞았다. 창업 당시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무엇을 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일까’ 고민하다가 세상을 깨끗하게 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고 그 마음이 ‘깨끗하게 돈 벌어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으로 발전했다. 그 마음으로 일을 하다보니 천직이 됐고, 창업을 결심할 때 가졌던 소명의식이 다행히도 아직 변치 않았다.”

-직접 발품을 팔아 스타트업을 발굴한다고 알고 있다.

“세 단계가 있다. 우선 투자할 사업 분야를 먼저 결정한다. 결정하는 기준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다. 예를 들면, 게임산업이 최근 인기가 많은데 게임 자체가 세상을 변화시키기는 어렵지 않나. 그 대신 게임을 활용한 교육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투자할 분야가 되는 것이다.

그 다음엔 자체적으로 그 분야에서 궁극의 해법을 찾는다. 예를 들어 플라스틱 분야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다면, 어떻게 하면 플라스틱이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을 해소할 수 있을지 직접 연구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매우 많은 양의 공부가 필요하다. AC의 역량이 쌓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공부 끝에 해법을 찾으면 그에 맞는 스타트업을 찾아 투자하고 육성한다. 투자 유치 오디션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투자 성공률은 높다.”

-크립톤에는 어떤 사람들이 일하고 있나. 각계 전문가들이 필요할 것 같은데.

“특별히 전문가를 뽑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가르친다. 도제식 교육처럼 어떻게 하는지 옆에서 보면서 배우게 만든다. 3년 정도 열심히 허덕이다 보면 우리의 방식을 자기 걸로 체화해 성과를 내더라. 내부에 액셀러레이팅 전담 직원은 7명정도가 있고 총 60여개 스타트업을 담당하고 있다. 다른 회사에 비해선 직원과 포트폴리오사가 적은 편이지만,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하려고 한다.”

-직원들이 크립톤 사무실이 아닌 스타트업으로 출근을 한다고.

“그렇다. 크립톤 사무실에는 직원이 잘 없다. 월요일에 주간 회의만 한 번 하고 각자 현장으로 흩어져 자율적으로 근무한다. 공유오피스에 직원들이 쓸 수 있는 큰 방을 한 칸을 임대해서 쓰고 있는데 이정도면 충분하다. 직원들은 각자 자신이 담당할 스타트업을 발굴하는 일부터 육성, 투자, 사후 관리까지 직접 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담당자가 전담 마크하는 방식이다. 대표도 예외가 없다. 이 때문에 스타트업들도 우리를 단순한 투자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회사 식구처럼 여긴다.”

-AC가 빠르게 늘고 있다. 생태계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오늘날 한국의 창업 생태계를 만든 데엔 AC의 공이 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AC의 본질을 잊어가고 있다는 것은 큰 문제다. AC는 초기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데 그치지 않고 투자한 기업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일련의 과정을 함께하는 데 의의가 있다. 투자만 하는 건 VC다. 많은 AC들이 마이크로 VC처럼 되어 가고 있다.

더 큰 문제는 AC 수는 분명히 늘었지만 허수(虛數)가 많다는 점이다. 국내 AC 중 연간 1억원 이상 투자하는 곳이 10%도 안 될 거라고 본다. 전체 중 절반 이상이 용역회사에 가깝기 때문이다. 국내 AC가 이렇게 많이 생긴 이유 중 하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정부와 대기업이 창업지원사업을 대폭 늘렸기 때문인데, 내부에서는 이를 담당할 전문가가 없으니 주로 AC에 외주를 준다. 규모가 많게는 10억원까지 되다보니 그 용역사업으로 먹고 사는 AC가 생겨나게 됐다. 경제가 얼어붙기 시작하면서 용역사업도 줄어들 텐데 앞으로 꽤 많은 곳들이 개점 휴업 상태가 될 우려가 크다. 시급하게 개선돼야 할 문제다.”

-말하자면 업계 위기가 닥친 것인가.

“그렇다. 양적으로는 팽창했지만 제 기능을 잘 못하고 있는 곳이 너무 많다. 시장논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도태될 시점이 왔다고 본다. 앞으로 몇 년 사이에 AC 시장에도 거품이 꺼질 것으로 보인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무엇이 문제라고 보나.

“우리나라 산업 생태계가 해외에서 ‘껍데기’만 배워온다는 것이 문제다. 국내 대부분의 AC는 미국의 ‘와이콤비네이터(Y Combinator)’를 모태로 삼고 있다. 10여년 전 와이콤비네이터가 투자 받을 스타트업을 모집하고 경쟁을 시켜 최종 투자 기업을 선발하는 방식(배치 프로그램)을 보고 액셀러레이팅을 그저 배치 프로그램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은 그게 아니다. 그 당시에 스타트업을 발굴하는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면 와이콤비네이터는 굳이 그 방법을 쓰지 않았을 거라고 본다. 지금은 더 좋은 방법이 많다. 액셀러레이팅의 본질을 다시 고민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