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SK하이닉스(000660)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산업단지) 내 공업용수 취수 문제로 경기 여주시와 갈등을 빚고 있는 가운데, 국가가 직접 나서서 기업과 지자체 간 갈등으로 인한 사업 지연을 사전에 방지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미국 등 해외 국가들은 기업 유치에 대통령부터 나서서 공을 들이고 있는 반면, 한국은 지역사회의 반대에 부딪혀 사업이 아예 무산되거나 진행이 더뎌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국내 기업의 오프쇼어링(Offshoring·비용 절감을 위해 생산시설을 해외 국가로 이전하는 것)을 가속화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SK하이닉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감도/뉴스1

9일 재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의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독성·고당·죽능리 일원 415만㎡ 부지에 차세대 메모리 생산 기지를 구축하는 사업이다. SK하이닉스는 이곳에 약 120조원을 투자해 반도체 생산 단지를 조성하고 여주 남한강에서 하루 26만5000톤(t)의 공업용수를 취수할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지난해 5월 공업용수 시설 구축을 위한 인허가를 용인시에 요청했으나, 여주시의 반대에 부딪쳐 아직 착공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2차 전지 소재 기업 에코프로비엠(247540) 역시 지난해 10월 청주시에 R&D캠퍼스를 조성하려던 사업이 주민 반대에 부딪혀 난관을 겪고 있다. 해당 사업은 사업비 3000억원을 투자해 청주시 오창과학2단지 내 약 15만㎡ 부지에 에코프로비엠을 비롯한 에코프로 그룹 계열사의 인력을 결집, 이차전지 R&D 혁신거점단지를 만드는 것을 골자로 한다. 2023년까지 산업단지 조성을 마친 뒤 2027년까지 R&D 시설이 들어설 계획이었다. 그러나 계획이 발표된 후 사업 예정지인 중신리 토지주들은 환경오염, 재산권 침해 등을 이유로 사업에 반대하고 나섰다. 해당 사업은 현재 부지 확보를 위해 농림부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지만, 지주들로부터의 토지 매수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는 상황이다.

지난 2015년 착공한 삼성전자(005930)의 평택 반도체 공장의 경우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송전선로 건설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5년이 걸렸다. 평택 공장에는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총 24㎞의 송전선로가 지나갔는데, 안성시 원곡면 주민들이 건강권을 이유로 지중화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삼성전자와 한국전력(015760)은 지난 2019년 3월 결국 법원의 중재안을 받아들여 해당 구간에 터널을 뚫어 지중화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삼성전자는 750억원에 달하는 송전선 지중화 비용을 모두 부담해야 했다.

최근 전자상거래 기업 쿠팡 역시 전북 완주군에 1300억원을 투자해 첨단 물류센터를 짓기로 한 계획을 철회했다. 앞서 쿠팡은 완주군과 지난해 3월 테크노밸리 제2일반산업단지에 약 10만㎡ 규모의 물류센터를 짓는다는 내용의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투자협약 체결 당시 양측은 토지 분양 비용을 평당 64만5000원으로 합의했으나, 이후 완주군은 토지 조성 공사 비용이 올랐다며 일방적으로 가격 30%를 올려 평당 83만5000원을 제시했다. 이에 쿠팡은 “완주군이 여러 합의사항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협약을 추진하기 어려워졌다”며 투자 계획을 철회했다.

대형건설사 주도의 민간 개발이 추진되고 있는 인천 신항 항만배후단지도 지역 사회의 거센 반발에 직면해 있다. 해양수산부는 GS건설(006360), HDC현대산업개발(294870) 등으로 구성된 민간 컨소시엄을 통해 인천 신항 배후단지 건설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실천연합 등 시민단체는 민간개발·분양이 난개발을 일으키고 항만의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공공개발 전환을 촉구하며 발목을 잡고 있다.

이처럼 곳곳에서 우리 기업의 국내 투자가 지역의 반대에 부딪히고 있지만, 해외 국가들은 우리 기업을 상대로 대통령부터 직접 나서 투자를 공격적으로 유치하고 있다. 특히 ‘반도체 공급망 재구축’을 내세운 미국의 정부의 적극적인 ‘러브콜’에 국내 기업들이 호응하는 모양새다.

미국은 이미 삼성전자(005930)로부터 170억달러(약 22조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으며, 향후 20년에 걸쳐 2000억달러(약 260조원) 규모의 추가 투자 계획까지 전달받았다. 또한 최태원 SK(034730)그룹 회장은 지난달 26일(현지 시각) 백악관에서 이뤄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의 화상 면담에서 220억달러(약 29조원) 규모의 대미(對美) 추가 투자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지자체와의 갈등으로 기업들의 투자가 지연되거나 무산되자 국회는 관련 법안을 발의하며 진화에 나섰다. 국민의힘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특별위원회(위원장 양향자)를 비롯한 여야 의원 35명은 ‘국가첨단전략산업 경쟁력 강화 및 보호에 관한 특별조치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지난 4일 공동 발의했다.

법안은 국가첨단전략산업위원회가 기존의 첨단산업단지 지정·해제 권한뿐만 아니라 조성 권한까지 부여받아 조성 단계부터 국가가 개입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법안이 통과되면 단지 조성 단계부터 국가가 직접 개입할 수 있어 SK하이닉스의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사례처럼 단지 지정을 마친 후 지자체 간 갈등이 불거져 사업이 지연되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게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