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실리콘밸리의 대표 액셀러레이터(창업기업 발굴·육성 전문회사)인 와이컴비네이터에서 최근 자사가 투자한 스타트업 대표들에게 보냈다는 ‘위기 메시지’가 국내 스타트업 업계에도 빠르게 회자되고 있다. 와이컴비네이터는 메모에서 “현재 분위기가 좋지 않다”면서 “향후 6~12개월 내 투자 유치 계획이 있었다면 성과가 있었더라도 가능성이 상당히 낮을 것을 인지하고, 향후 24개월 동안 회사가 ‘생존’할 수 있도록 전략을 설정·실행해라”라고 적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지난 16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테크 스타트업의 파티는 끝났다(For Tech Startups, the Party Is Over)”는 제목의 기획 기사에서 스타트업으로 향하던 자금줄이 말라가고 있는 만큼 지출을 줄이고, 돈을 버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취지로 보도했다.

'오늘의집' 앱 화면. 오늘의집 운영사인 버킷플레이스는 최근 기업가치 2조원 이상으로 평가 받으며 설립 8년 만에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비상장 스타트업) 반열에 올라섰다. /버킷플레이스 제공

코로나19로 전 세계적으로 풀렸던 시중 자금이 회수되면서 국내에서도 스타트업의 몸값이 적정한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최근 ‘오늘의집’ 운영사인 인테리어 콘텐츠·상거래 플랫폼인 버킷플레이스가 기업가치 2조원을 평가받아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비상장 스타트업) 반열에 올랐다.

비바리퍼블리카(토스), 우아한형제들(배달의민족), 야놀자, 컬리 등은 상장하면 대박이 기대되는 ‘대어’로 일찌감치 몸값을 띄워 놓은 상태다. 지난해 말부터 감지된 ‘위험 신호’에도 올 1분기 국내 스타트업의 투자 유치액은 약 3조1418억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던 지난해 1분기(1조1812억원) 기록을 다시 뛰어넘은 상태다.

◇ 기업이 끌고, 정부가 밀고… “IT 버블 때와 다르다”

24일 국내 스타트업, 벤처캐피탈(VC) 업계 취재를 종합해 보면 전 세계적 투자 위축 분위기가 한국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겠지만, 과거 IT 버블 때와는 분위기가 다르다는 반응이 많다. 스타트업에 돈을 대는 자금줄이 과거보다 두터워졌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대형 VC 고위 관계자는 “VC나 스타트업 투자를 위한 심사역 수가 양적으로 늘어나기도 했지만, 단순히 수익을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신성장동력으로 활용하려는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CVC)이 늘어난 것도 고무적인 변화”라면서 “현대차(005380), 삼성전자(005930), LG전자(066570)를 비롯해 에너지, 건설 등 많은 업종의 CVC가 사업의 파트너로서 스타트업을 중요시하고 있는 걸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스타트업에 돈을 대는 ‘모태펀드’에 지속적으로 예산을 쏟아붓고 있는 점도 버팀목이 될 것이라고 업계는 보고 있다. IT 서비스를 내놓고 있는 스타트업 대표 A씨는 “자기자본 중심으로 투자하는 민간 VC 위주의 실리콘밸리와 달리 한국은 정부가 매년 1조원 이상의 모태펀드에 출자하고 VC가 이를 운용해 수수료 수익을 일부 내고 있다”며 “’기업 육성’ ‘고용 창출’이라는 효과도 있는 만큼 정부는 관련 예산을 늘릴 수밖에 없고, 덕분에 스타트업뿐 아니라 VC가 상생할 수 있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최근 오늘의집이 2300억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하며 몸값을 높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도 정책금융 지원의 한 사례라고 이 대표는 설명했다. A씨는 “당분간 투자에 신중한 분위기가 있을 수 있겠지만, 모태펀드 운용 기간이 정해져 있고 투자가 집행돼야 하기 때문에 연말부터는 경직된 분위기가 풀리지 않겠느냐”고 내다봤다.

방한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20일 경기 평택의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윤석열 대통령, 이재용 부회장과 함께 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 대통령실사진기자단

◇ 이제는 소·부·장 스타트업의 시간

이번 위기론이 코로나19 유행에 따른 플랫폼 비즈니스의 급성장과 이에 따른 투자 급증 분위기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시중에 풀렸던 돈을 회수하고 금리가 올라가는 과정에서 ‘코로나 수혜주’로 분류됐던 기업 투자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간 상장 후 매각 차익을 기대하며 투자에 공격적으로 임해 왔던 일본의 ‘소프트뱅크(비전펀드)’나 미국 헤지펀드 ‘타이거글로벌’ 등은 대규모 적자를 기록했다. 소프트뱅크의 기술 전문 투자 펀드인 소프트뱅크는 최근 회계연도에서 투자 손실이 약 37조원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타이거글로벌도 올해 들어서만 20조원이 넘는 손실을 낸 것으로 전해졌다.

VC 업계 고위 관계자는 “비상장 스타트업뿐 아니라 상장사 중에서도 코로나로 덕을 봤던 로블록스(메타버스)나 넷플릭스(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텔레닥(원격의료) 같은 기업들의 주가가 두자릿수대로 곤두박질치고 있다”면서 “플랫폼, 바이오 기업들은 이제 성장 스토리보다는 수익 등 실력을 보여주는 ‘2단계’로 넘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러시아·중국발(發) 원자재 위기와 미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 등의 정세 흐름에서 지역 공급망 구축에 대한 수요가 커지고 있어 이미 기술·비즈니스를 탄탄하게 구축한 관련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스타트업으로 돈이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