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형 조선사들이 선수금환급보증(RG, Refund Guarantee)을 잘 받지 못해 선박을 수주하고도 건조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발주처는 선수금을 떼일 경우를 대비한 보증으로 조선사에 RG를 요구한다. 금융사는 수수료를 받고 RG를 발급하는데, RG가 없으면 수주한 계약이 취소될 수 있다.

RG 발급이 지체되는 이유는 지난해 중형 조선사의 수주가 대폭 늘면서 발급 한도가 소진됐기 때문이다. 중형 조선사의 RG발급은 수출입은행이나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이 대부분 담당한다. 조선업계에서는 “대표적인 경기순환 산업인 조선업의 특성상 시황이 좋아지는 시점에 일감을 확보해 경영을 정상화해야하는데, 국책금융기관들이 불황기를 기준으로 수주를 제약해 산업 정상화를 저해하고 있다”는 불만이 나온다.

대선조선이 건조한 친환경 컨테이너선 사진. /대선조선 제공

13일 업계에 따르면 중형 조선사인 대선조선은 1월 6일 계약한 1000TEU급 컨테이너선 2척, 1월 7일 계약한 1000TEU급 컨테이너선 2척에 대한 RG를 발급받지 못했다. 일반적으로는 수주 계약 체결 시점부터 3개월 이내에 RG가 발급된다.

은행 측은 대선조선 RG 발급이 한도에 도달했다는 이유를 들면서 추가담보나 연대보증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선조선은 일단 선주사에 5월말까지 기다려 달라고 요청한 상태다. 1월 28일 계약한 3만3000톤급 SUS(스테인리스강) 화학 탱커 1척도 같은 이유로 6월까지 RG 발급 기한을 늘렸다. 선주사들은 계약 해지 가능성 및 법적 조치 압박을 하고 있다.

케이조선(구 STX조선해양)도 지난달 이후 3억달러, 7억달러 규모의 계약을 각각 추진하고 있지만 RG에 발목이 잡혔다.

RG를 발급하는 금융사는 중형 조선사에 발급하는 RG를 위험자산으로 보고 한도를 정해놓고 있다. 대한조선은 5억 달러, 케이조선 4억5000만 달러, HJ중공업 3억5000만 달러, 대선조선 2억2000만 달러 등이다. 이 한도가 다 차면 추가 수주가 불가능하다. HJ중공업만 한도가 약 30% 남았고 다른 조선사는 작년에 수주가 늘면서 한도가 거의 소진됐다.

조선해양플랜트협회에 따르면, 대한조선·대선조선·케이조선·HJ중공업 등 중형 조선 4사의 연간 수주액 합계는 2019년 10억7300만달러, 2020년 6억6700만달러였지만, 지난해 26억6300만달러로 급증했다.

업계에서는 국책금융기관이라면 산업 활성화 차원에서 RG 한도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조선사 관계자는 “지난해 수주량이 늘어나긴 했으나 향후 1년 반 정도의 일감이 확보됐을 뿐, 추가 수주가 이뤄지지 않으면 내년 중반부터는 또 일감이 부족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책은행이 RG 발급에 소극적으로 나서면서 주요 일감이 중국으로 넘어간다는 지적도 나온다. 중국은 RG 발급 문제를 국영 조선그룹 산하 금융 계열사 등을 통해 해결하고 있다. 조선해운시황 분석기관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4월 한 달간 중국 조선업계는 전 세계 발주량 중 1800TEU급 소형 컨테이너선, PCC(자동차운반선), 소형벌크선, 화학제품운반선 등 다양한 선종을 고루 수주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한국 조선업체는 LNG운반선과 8000TEU급 중대형 컨테이너선을 중심으로 수주하는 모습이었다.

일각에서는 중형 조선사들이 일감 확보를 위해 저가 수주에 나설 가능성이 커 RG 발급을 엄격하게 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공장을 돌리기 위해 저가로 수주하면 나중에 적자가 발생해 회사가 부실화될 가능성이 있다.

경남 창원시 진해구 케이조선(구 STX조선해양) 조선소 전경. /케이조선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