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처벌법(중처법)이 시행된 지 3개월이 지난 가운데, 기업들이 과도한 처벌 우려와 함께 서류 업무 부담까지 느끼고 있다. 특히 인력이 부족한 중소기업들은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정부가 요청한 서류를 준비하느라 업무가 마비될 정도라고 토로했다.
28일 재계에 따르면 최근 중대재해가 발생한 지방의 한 전문건설업체는 고용노동부 관할 지청으로부터 100종에 가까운 자료를 제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사고 당시 폐쇄회로(CC)TV 영상 등 중대재해 관련 자료는 물론이고 전체 근로자 명부, 예산 편성·집행 내역서, 임금협상 단체협약서 등 사고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자료까지 제출 자료 목록에 포함돼 있었다.
고용노동부는 이 업체에 사업계획서 및 투자계획서, 이사회 최종 의사결정자료, 인사·노무·회계 관련 내부결재자료까지 제출을 요구했다. 모두 영업 기밀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업체 관계자는 “사고 수습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고용노동부가 요구한 자료들을 준비하느라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라며 “어떻게든 탈탈 털어 경영 책임자를 처벌하겠다는 의도로 밖에 안 보인다”고 말했다.
대기업과 달리 자금력과 전문 인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은 방대한 중대재해 관련 서류를 준비하느라 애를 먹고 있다. 기본적으로 기업이 사전에 준비해야 할 서류 작업이 상당하다. 법에 따라 안전·보건 의무 이행 관련 10여 가지 항목들에 대한 실적을 반기마다 1회 이상 평가, 관리해야 하는데 중소기업의 예산과 인력으로는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국내 한 대기업 안전 관리 담당자조차 “안전 예산 집행 내역뿐 아니라 사업장 내 각종 위험성 평가 결과까지 근거자료를 일일이 기록하고 보관해야 하기 때문에 행정력이 총 동원돼야 할 정도”라고 말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이달 국내 기업 367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근로자 수가 1000명이 넘는 대기업의 83.8%는 안전 관련 예산이 중처법 제정 전에 비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중견기업(300∼999인)은 78.3%, 중소기업(50∼299인)은 67.0%만 관련 예산이 늘었다고 답했다.
예산 증가 규모에서도 기업 규모별로 차이를 보였다. 대기업은 안전 관련 예산이 중처법 제정 전보다 200% 이상 늘었다는 답변이 가장 많았지만, 중견 기업은 50∼100%, 중소기업은 25% 미만으로 늘었다는 답변이 가장 많았다.
중소기업이 한정된 예산으로 안전 관리 인력을 구하고 싶어도 쉽지 않다. 대기업에서 중처법 제정 이후 안전 관리 인력을 경쟁적으로 채용하면서 이들의 몸값이 뛰었기 때문이다. 작은 사업장에서는 안전관리총괄책임자인 현장소장보다 안전관리자 몸값이 높은 역전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구인난도 심각하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은 올해부터 2023년까지 50억원 이상 80억원 미만 건설기업의 사업현장에 추가로 필요한 안전관리자는 4000명에 달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전문가들은 기업의 중처법 관련 업무 부담을 정부가 낮춰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전혜선 열린노무법인 대표노무사는 “현재 고용노동부가 요구하는 자료를 감당할 수 있는 국내 기업은 상위 1%뿐”이라며 “기업이 예측 가능하고, 사전 관리가 가능한 수준으로 서류 업무 부담을 낮춰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고용노동부가 중대재해예방매뉴얼을 통해 준비 서류 목록을 소개하는 작업도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