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신고리 5·6호기 원자력발전소의 조기 가동을 주문한 당일, 원전 운영 허가 권한을 가진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이 원전에 대한 운영허가 보고 안건을 '패싱'한 것으로 확인됐다. 원안위는 일부 위원의 불참과 위원들의 개인 일정, 회의 시간 연장 등으로 해당 보고를 다음 회기로 미뤘다고 설명했다. 원전 업계에서는 문 대통령과 원안위의 손발이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4일 원전 업계와 관계 부처에 따르면 원안위는 지난 달 25일 154회 회의에서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으로부터 신고리 5·6호기 운영허가 심사 계획을 보고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위원들의 요청에 따라 해당 보고 안건은 당일 취소됐다.

당시 회의에 배석한 관계자 등에 따르면 이날 재적 위원 9명 중 2명이 불참했고, 회의에 참석한 일부 위원이 지방 출장 등을 이유로 회의 종료를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한국수력원자력에 대한 행정처분 안건을 논의하면서 회의 시간도 예정보다 다소 길어졌다고 한다. 원안위는 이날 허가받지 않은 기기를 원전에 설치·교체하거나 내환경·내진 검증요건을 만족시키지 않는 등의 행위로 한수원에게 과징금 319억5000억원을 부가했다. 결국 유국희 위원장은 신고리 5·6호기 운영허가 심사 계획 보고를 다음 회기로 미루고 회의를 종료했다. 이날 상정된 안건 중 유일하게 신고리 5·6호기 운영허가 심사 계획 보고만 연기됐다.

정재훈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이 지난 2월 15일 울산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 현장을 찾아 안전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한국수력원자력 제공

일반적으로 한국수력원자력은 KINS의 사용전 검사와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심의 기간 등의 일정을 고려해 원전 완공 20~30개월 전에 미리 운영허가를 신청한다. 한수원은 2020년 8월 원안위에 신고리 5·6호기 운영허가 신청서를 처음 제출했다. 이후 신청 서류를 보완해 지난달 신청서 개정본을 다시 제출했다. 신고리 5·6호기는 1월 말 현재 74.82%의 준공률을 보이고 있다.

현재 신고리 5·6호기 운영허가는 서류적합성 검토를 끝내고 본 심사에 들어가기 전 단계에 있다. 본심사가 끝나면 원안위 전문위원의 검토와 원안위 심의, 의결 과정을 거쳐 최종 운영허가가 승인된다.

원안위 회의가 있던 날 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현안 점검 회의를 열고 신고리 5·6호기의 조기 가동을 주문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신한울 1·2호기와 신고리 5·6호기에 대해 "포항과 경주의 지진, 공극(구멍) 발생, 국내자립기술 적용 등에 따라 건설이 지연됐다"며 "그간 안전성을 높이기 위한 기준 강화와 선제적 투자가 충분하게 이루어진 만큼, 가능하면 빠른 시간 내에 단계적 정상가동을 할 수 있도록 점검해 달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원전이 지속 운영되는 향후 60여 년 동안은 원전을 주력 기저전원으로서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고도 했다. 문 대통령이 신고리 5·6호기 조기 가동을 주문한 날, 원안위는 위원 불참 및 지방 출장 등을 이유로 신고리 5·6호기 심사 계획 보고를 취소한 것이다.

업계에서는 문 대통령이 조기 가동을 주문한 원전 중 신한울 1호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이미 문재인 정부 손을 떠났다고 지적한다. 준공률 99%인 신한울 2호기는 현재 운영허가 심사를 받고 있으나, 문 대통령 임기 내 허가가 나오진 않을 전망이다. 한수원은 이르면 오는 6월에 운영허가가 승인되길 기대하고 있다. 신한울 2호기의 쌍둥이 원전인 신한울 1호기는 지난해 7월 완공 15개월 만에 운영허가를 받았다. 심사 계획 보고가 미뤄진 신고리 5·6호기는 운영 허가까지 상당한 기간이 필요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 에너지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신고리 5·6호기 조기 가동 의지가 있었다면 원안위가 회의 시간 연장이나 위원 지방 출장을 이유로 보고 안건을 연기했겠느냐"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