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우려로 에너지 대란 조짐이 나타나면서 한국전력(015760)의 적자 규모도 기록적 수준으로 확대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앞서 한전은 탈원전 정책으로 원전 이용률이 줄어들자 단가가 비싼 액화천연가스(LNG) 비중을 늘렸고, 이에 따라 부채가 크게 늘어난 상황이다. 여기서 LNG 가격과 국제유가가 더 오르면 지금의 한전 재무상태로는 감당이 어려워진다. 한전은 올해 전기요금을 올릴 계획이지만, 정부의 물가 관리로 얼마나 올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23일 전력거래소에 따르면 전력도매가격(SMP)이 지난달 킬로와트시(kWh)당 154.42원을 기록했다. 이는 1년 전인 지난해 1월보다 (70.65원)보다 118.6% 급등한 수준이다. SMP는 이달 들어 더욱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 7일 200.6원을 시작으로 22일엔 216.31원까지 올랐다. 통계가 시작된 2001년 이후 역대 세 번째로 높은 수준이다. 지금까지는 2012년 2월 8일 기록한 225.17원이 최고치다.
SMP 상승세는 한국가스공사(036460)가 LNG 연료단가를 전월 대비 28% 인상했기 때문이다. SMP는 LNG 가격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태 등 지정학적 위기로 국제 유가와 함께 LNG 가격이 큰 폭으로 오르면서 SMP를 끌어올렸다. 실제 산업통상자원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달 LNG 현물 가격은 톤(t)당 1136.68달러로 전월 대비 27.35% 상승했다.
한전은 발전 공기업과 민간 발전사들로부터 전력을 사들인 뒤 이를 팔아 수익을 내야하는데, 구입 비용이 SMP에 따라 결정된다. 한전은 SMP 상승으로 인한 비용을 부담하기 위해 빚을 대량으로 내고 있다. 지난달에만 2조800억원 규모의 공사채를 발행하며 월간 사상 최대치를 찍었고, 이달 들어서도 지난 22일까지 1조8100억원어치 공사채를 발행했다.
에너지 업계에서는 한전이 탈원전으로 인해 타격을 입은 상황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태까지 맞이해 재무건전성이 크게 악화될 수 있다며 우려하고 있다. 지난 7일 ‘에너지정책 합리화를 추구하는 교수협의회’(에교협) 토론회에서 심형진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지난해 한전 부채가 2016년보다 약 34조원 증가했다고 밝혔다. 이중 3분의 1가량인 약 10조원이 탈원전 영향이라는 것이 심 교수의 분석이다.
그는 “한전의 재정 악화는 탈원전에 따른 원전 이용률 감소와 LNG의 가격 인상 때문”이라며 “원전이 2016년 전력 공급 비중인 29.7%(이용률 약 80%)를 유지했다면 5년간 10조2000억 원의 손실을 방지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태로 앞으로 에너지 가격이 더 오르면 한전의 부채 규모는 더욱 커질 수 있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은 지난 15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러시아의 대(對)유럽 석유·가스공급 차질이 일어나면 국제유가가 두바이유 기준 배럴당 최고 150달러까지 오를 수 있다고 전망했다. 러시아는 세계 원유와 천연가스 생산량의 각각 12%, 16%를 담당한다.
연료비 변동을 전기요금에 반영하는 ‘연료비 연동제’가 정상 작동한다면 한전 부담이 다소 줄어들 수 있지만, 최근 치솟는 물가 관리를 위해 정부가 에너지 가격 인상을 억누르면서 이마저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앞서 정부는 올해 1분기 전기요금은 국민 생활 안정 등을 감안해 동결했지만, 4월과 10월에는 두 차례에 걸쳐 기준연료비를 1kWh당 4.9원씩 인상하기로 했다. 다만 지난해 인상 요인에 비해 전기요금을 충분히 올려놓지 않은 상황이라 이 정도 인상으로는 한전의 부담을 해소하기 어렵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064850)에 따르면 한전은 지난해 5조1006억원의 적자를 냈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로 국제유가가 치솟았던 당시 기록한 적자 2조7981억원의 두 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증권가는 이대로면 올해 한전 적자가 9조2715억원까지 급증할 것으로 보고 있다. 나민식 이베스트투자증권 연구원은 “역사적으로 한전의 영업 적자는 전기요금 인상 압력의 요인으로 작용했다”며 “정치적으로 양대 후보 모두 원가 연동형 연동제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고 있고, 선거 결과와 무관하게 전기요금 인상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