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의 돈바스 지역에 ‘평화 유지군’ 명목으로 군대를 투입하면서 두 나라에서 반도체용 희귀 가스 등을 수입하는 국내 산업계는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23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전자(005930)SK하이닉스(000660) 등은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네온, 크립톤, 크세논 등 희귀 가스의 각각 23.0%, 30.7%, 17.8%를 우크라이나에 의존하고 있다. 이들 기업은 최근 공장 가동을 위한 희귀 가스 재고를 미리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생산 차질이 불가피하다는 게 업계의 관측이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따르면, 지난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침공했을 당시 네온 가격은 600% 급등했다.

22일(현지 시각) 우크라이나 동부의 분쟁 지역인 루간스크주 샤스티아 외곽의 발전소가 포격을 받은 뒤 연기가 치솟고 있다. /AFP 연합뉴스

LG에너지솔루션(373220), SK온 등 이차전지(배터리) 업계도 비상이 걸렸다. 배터리의 핵심 소재인 양극재에 들어가는 원재료 중 니켈과 알루미늄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생산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런던금속거래소(LME)에 따르면 니켈 가격은 지난 21일 기준 톤(t)당 2만2870달러로, 전월 평균 대비 11.4% 증가했다. 알루미늄 가격도 t당 3315달러를 기록하며 사상 최고치였던 2008년 7월 11일(t당 3380.15달러) 가격에 근접한 수준까지 올랐다. 미국 에너지관리청(EIA)에 따르면, 세계 광물 수출의 러시아 비중은 니켈 49%, 알루미늄 26%에 달한다.

유연탄 가격도 고공행진 중이다. 호주 뉴캐슬탄 6000킬로칼로리(㎉) 기준 유연탄 가격은 지난해 1월 1t당 평균 103.0달러에서 같은 해 4분기(10~12월) 272.3달러로 약 164% 증가했다. 러시아 천연가스에 의존하는 유럽 국가들이 대체재로 유연탄을 찾으면서 수급 불균형이 발생해 가격이 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에 유연탄의 러시아산 수입 의존도가 75%에 달하는 국내 시멘트업계는 사태 악화 시 더 큰 피해가 예상되는 상황이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공급망 혼란으로 천정부지로 치솟던 산업용 원자재 가격은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가 겹치며 수급 불안까지 커지는 모양새다. 경기에 선행해 움직여 ‘구리 박사(Dr. Copper)’라는 별명을 가진 구리는 높은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바로 상품을 받겠다는 수요자가 늘면서 ‘백워데이션(선물이 현물보다 싼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주석과 아연 가격도 지난 1년 새 각각 74%, 25% 올랐다.

일러스트=정다운

국제적인 원자재 가격 급등으로 국내 기업들은 당분간 채산성(수지·손익을 따져 이익이 나는 정도) 부진이 계속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주요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기업경기실사지수(BSI) 조사 결과 3월 채산성은 99.1을 기록했다. BSI는 100 이하면 ‘부정’을 의미하는데, 채산성 전망치는 작년부터 이어진 원자잿값 상승으로 지난해 6월부터 9개월째 기준선(100.0)을 밑돌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원자재의 경우 업체들이 장기 공급 계약을 맺어 조달하고 있어 당장은 직접적인 피해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원가 비용이 더 들면서 물가 부담이 커지고 제품 가격까지 인상되는 등 연쇄적인 피해가 불가피해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