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업들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해 미래 성장 전략을 마련하고 투자를 확대하고 있지만, 한국 기업은 규제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기업 경쟁력은 곧 국가 경쟁력이다. 기업 활동이 위축되면 국가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기업 규제에 대한 문제점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이에 대한 해법을 살펴본다.[편집자주]
최근 더불어민주당의 한 의원이 메타버스(가공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현실 세계를 의미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 산업을 육성하겠다며 발의한 법안을 보고 한 대기업 임원은 한숨을 쉬었다고 했다. 법안은 민간이 아닌 정부가 주도권을 잡고 산업을 육성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법안에는 국무총리 산하에 메타버스 관련 사항을 심의·의결하는 위원회를 두는 내용도 포함됐다. 사실상 관리·감독기관을 두겠다는 의미다.
이에 앞서 국민의힘이 발의한 메타버스 산업 진흥법까지 통과되면 중복 규제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메타버스에 게임적 요소를 적용한 서비스를 할 경우 게임산업 규제와 메타버스 규제를 동시에 받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임원은 “이제 막 태동하는 산업을 법안으로 규정하고, 제단하는 것 자체가 산업을 위축시키는 요인이 된다”며 “요즘 같은 분위기라면 국회 논의 과정에서 대기업의 메타버스 산업 진출 금지 법안까지 나올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은 ‘규제 공화국’이다. 역대 정부는 출범 당시 모두 규제 개혁을 약속했지만, 성과는 늘 초라했다. 문재인 정부에선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 중대재해법, 기업규제 3법(상법 개정안, 공정거래법 개정안, 금융그룹감독법안) 등 기업을 옥죄는 규제가 쏟아졌다.
재계에서는 문재인 정부의 규제 일변도 정책이 가능한 이유 중 하나로 사전 평가 없이 발의가 가능한 의원 입법제도를 꼽았다. 현행법상 정부 입법은 관계부처, 당·정 간의 협의를 거친 뒤 규제영향 평가, 법제처 심사, 차관회의, 국무회의, 대통령 결재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규제영향 평가에서는 ▲규제 신설 및 강화 필요성 ▲규제 외 대체수단의 존재 여부 및 기존 규제와의 중복여부 ▲규제대상 집단과 국민이 부담하는 비용과 편익의 비교분석 등을 까다롭게 심사한다. 이 때문에 정부가 발의한 법이 국회에 제출되려면 적게는 6개월, 길게는 수년이 걸리기도 한다.
반면 의원입법은 10인 이상 동료 의원의 동의만 받으면 발의가 가능하다. 법안을 제출할 때 비용 추계서만 내면 된다. 이렇다 보니 정부는 의원을 통해 법안을 발의하는 이른바 ‘청부입법’이라는 편법을 쓴다. 이런 편법은 법안 발의 실적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지난 20대 국회에서 제출된 2만4141건 중 의원발의 법률안은 2만3047건으로 약 95.5%를 차지했다.
한 정당 관계자는 “법안 발의 건수가 의정활동의 주요 평가 지표이고, 특히 정부 대리입법(청부입법)은 정부·여당이 밀어주기 때문에 국회 통과 가능성도 높다”며 “정부와 여당 의원 간에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실제 문재인 정부가 주도적으로 추진하면서도 정부 입법이 아닌 의원 입법으로 국회를 통과한 규제 법안이 수두룩하다. 대표적인 기업 규제 법안으로 꼽히는 중대재해처벌법도 의원 입법이라는 이유로 규제영향평가를 받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가 공정경제 3법으로 작명한 공정거래법·상법·금융그룹감독법도 마찬가지다. 재계에서는 기업 경영을 위태롭게 만드는 법이라며 이 법안을 ‘기업규제 3법’으로 부른다. 집단소송법, 징벌적손해배상법, 노동조합 개정안 등 기업에 상당한 부담이 되는 법안들도 규제영향평가를 거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 들어 청부 입법이 급증한 것은 통계로 드러난다. 대통령 직속 규제개혁위원회가 운영하는 규제정보포털에 따르면 현 정부가 출범한 2017년 5월 10일부터 이달 26일까지 1723일 동안 국회의원이 발의한 법안 중 규제 법안으로 분류된 법안은 총 4107건으로 나타났다. 하루에 약 5개 꼴이다. 이는 박근혜 정부 시절 발의된 규제 법안(1313건)의 3배에 달한다. 180석의 거대 여당이 주도하는 21대 국회는 19개월 동안 1496건의 규제 법안을 쏟아냈다.
전진영 국회입법조사처 팀장은 “규제 정책은 불가피하게 국민이나 기업 등 규제 대상에 대해 권리를 제한하거나 의무를 부과하기 때문에 사전적인 규제영향분석을 통해 규제의 품질을 관리해야 한다”며 “의원입법에도 규제영향분석 제도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지난달 분석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상품시장 규제(PMR) 지수 순위에 따르면 한국은 38개 가입국 중 33위를 차지했다. PMR 지수는 상품시장(금융을 제외한 재화, 서비스 등)에 대한 규제 상태와 시장 구조에 대한 정보를 국가 간에 비교할 수 있게 고안한 지표다. 1위 국가의 규제가 가장 약하고, 38위는 규제가 가장 심하다는 뜻이다.
한국의 종합지수는 1.71로 1위 국가인 영국(0.78)은 물론 상위 5개국의 평균(1.0)과도 차이가 컸다. OECD 평균(1.43)보다도 높았다. 진입장벽 지수도 1.72로 높아 OECD 38개국 중 35위를 기록했다. 정부 개입에 의한 왜곡지수는 한국이 1.69로 OECD 평균 1.65보다 높아 개선 필요성이 제기됐다. 특히, 왜곡지수 평가 항목 중 ‘정부의 기업활동 개입’ 지수는 36위로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을 기록했다.
유환익 전경련 기업제도실장은 “한국은 규제 수준이 높은 데다 서비스·네트워크 부문에서 진입 장벽이 높고, 정부의 기업활동 개입이 심각한 상황”이라며 “시장 진입장벽을 해소하고 정부 개입에 의한 왜곡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