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유가 상승으로 국내 조선소에 악성 재고로 남아있던 중고 드릴십(시추선)을 찾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드릴십은 깊은 수심의 해역에서 원유·가스 시추 작업을 할 수 있는 선박 형태의 설비를 말한다. 조선사들 입장에선 재무에 막대한 손실을 끼쳐온 악성 재고를 처리할 수 있어 반기고 있다. 원유 시추사들도 건조에 3년 이상 걸리는 드릴십을 중고로 빠르게 인수할 수 있다.
22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대우조선해양은 최근 터키 시추사 터키페트롤리엄 코발트 익스플로어에 재고로 보유하고 있던 드릴십 1척을 매각했다. 이번에 매각한 드릴십은 2011년 미국 시추사 밴티지드릴링으로부터 6억6000만달러(당시 환율 기준 약 7700억원)에 수주한 선박이다. 당시 벤티지드릴링이 파산하면서 드릴십을 인도하지 못했고, 대우조선해양에 재고로 남아있었다. 매각 가격은 당초 수주했던 가격보다 낮은 것으로 알려졌다. 대우조선해양은 시추사 측에서 조선소를 방문해 시험 운전 등 인도 절차를 거칠 것이라고 밝혔다.
삼성중공업(010140)도 올해 6월 이탈리아 전문 시추 선사인 사이펨과 재고로 남아있던 드릴십 1척의 용선 계약을 체결했다. 용선 기간은 이달부터 2023년 8월까지다. 이번 계약에는 사이펨이 2022년까지 드릴십을 매입하는 옵션이 포함돼 매각 가능성도 있다. 사이펨에 용선하는 드릴십은 삼성중공업이 2013년 8월 그리스 선사인 오션리그로부터 수주했으나, 2019년 10월 계약이 해지되면서 악성 재고로 남아있었다.
드릴십을 찾는 시추사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최근 유가가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유가는 배럴당 70~80달러를 넘어섰다. 조선업계에 따르면 통상 육지에서 석유 1배럴을 시추하는 데 드는 비용은 배럴당 20달러 수준이다. 반면 드릴십 시추 비용은 배럴당 60달러다. 유가가 배럴당 60달러 이상은 돼야 수지타산이 맞는 셈이다. 2000년대 후반 국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섰을 때 세계 각지에서 드릴십 발주가 쏟아졌고 한국 조선사들이 대거 수주했으나 이후 유가가 하락하면서 재고로 남았었다.
국내 조선소들이 재고로 보유하고 있는 중고 드릴십은 시추사들에 매력적인 물량이다. 드릴십은 통상 건조에 3년 이상 걸린다. 시추사 입장에선 유가 상승 시기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최대한 빨리 드릴십을 인수해 시추에 투입하길 원한다. 기술력이 뛰어난 한국의 고사양 드릴십을 새로 건조하는 것보다 저렴하게 가져갈 수 있는 점도 장점으로 꼽힌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조선소도 애물단지였던 재고들을 처리할 수 있어 서로에게 ‘윈윈(win-win)’인 셈”이라고 평가했다.
조선사들은 드릴십 매각을 통해 재무 구조 개선에 속도를 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현재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은 각각 4척의 드릴십을 보유하고 있다. 모두 유가 폭락 시기에 시추사에서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거나 인수를 미룬 물량들이다. 드릴십 재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장부가치가 떨어지면 영업손실로 고스란히 반영된다는 점이다. 삼성중공업의 지난해 7664억의 연간 영업손실액 가운데 60%가 드릴십 관련 손실이었다. 만약 드릴십 매각에 성공할 경우 조선소들 입장에선 재고 자산을 현금화할 수 있어 재무 구조 개선 효과를 볼 수 있다.
삼성중공업 관계자는 “유가 상승으로 글로벌 에너지 기업들의 해양 개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태”라며 “드릴십 매수 문의도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우조선해양 관계자도 “유가 상승으로 드릴십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만큼, 드릴십 재고를 좋은 가격에 매도할 수 있도록 총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