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다음 달부터 유럽 내 공항 이용을 늘리지 않는 항공사들을 사실상 퇴출할 방침이어서 국내 항공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국제선 여객 수요가 거의 없기 때문에 막대한 손해를 무릅쓰고서라도 빈 비행기를 띄워야 할 상황이다. 대한항공(003490)과 아시아나항공(020560)은 기업 결합심사를 진행 중인 EU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 대응책 모색에 골머리를 앓는 모양새다.
27일 항공업계에 따르면 유럽연합집행위원회(EC)는 올해 겨울 시즌(10월 말~3월 말) 배분된 슬롯(Slot)을 절반 이상 소진한 항공사들에만 차기 년도 슬롯을 배정해줄 예정이다. 슬롯은 시간당 항공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횟수를 말한다. 슬롯을 배정받지 못하면 사실상 공항 이용이 불가능하다. 국내에서도 슬롯 배정 없이는 공항 이착륙이 불가능해 항공사간 슬롯 경쟁이 치열하다.
EU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일어나기 전 배정된 슬롯의 80% 이상을 소진하는 항공사에만 슬롯을 배정해왔다. 그러던 중 지난해 코로나19 사태로 항공 수요가 급격히 줄자 슬롯 의무 소진을 유예해왔다. 하지만 최근 유럽 내 백신 접종 확대로 여객 수요가 회복세를 보이자 오는 10월부터 슬롯 의무 소진을 재도입하겠다고 나섰다.
글로벌 항공업계는 EU의 방침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는 “현실과 동떨어진 결정”이라고 지적했다. 유럽 국가들 사이를 오가는 단거리 운송 시장과 달리 유럽 밖 장거리 운송 시장은 여전히 부진하기 때문이다. IATA에 따르면 올해 7월 아시아 지역은 2019년 대비 14%, 유럽은 46%, 북미는 48%만 국제선 항공편을 운항한 것으로 나타났다. IATA는 글로벌 항공사들이 슬롯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승객이 한 명도 타지 않은 일명 ‘유령 비행기(Ghost flight)’를 띄울 것이라고 우려했다.
국내 항공업계도 EU의 결정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EU의 요구에 맞추려면 최소 수십편의 빈 항공기를 매달 유럽 노선에 띄울 수밖에 없다”라며 “텅 빈 여객기를 띄우느라 매달 수십억원의 손해를 볼 수도 있다”라고 설명했다.
통상 국내에서 유럽까지 여객기를 한 번 띄우는 데 드는 비용은 약 2억원에 달한다. 국토교통부 항공정보포털시스템에 따르면 코로나19 사태 발생 전이었던 2019년 8월 국내 항공사들이 유럽 노선에 띄운 항공편은 총 3487편이었다. 수송 여객 인원은 71만943명이었다. 반면 올해 8월 운항한 유럽 행 항공편은 1091편, 여객 인원은 5만6380명에 그쳤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이번 결정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2019년 4분기 말 기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전체 여객 사업 매출액 중 각각 19%와 15%가 유럽 노선에서 발생했다. 같은 기간 화물 사업 매출액도 유럽 노선에서 각각 23%, 19%씩 발생했다.
항공업계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EU의 기업 결합심사를 기다리고 있는 만큼 울며 겨자먹기로 EU의 방침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으로 우려했다. 현재 두 항공사는 EU, 미국, 중국, 일본 등 6개 국가의 결합 심사를 올해 1월부터 8개월째 기다리고 있다. 여기에 최근 해외 경쟁당국 일부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간 ‘중복노선’에 대해 경쟁 제한 우려가 있다고 의견을 낸 만큼 외부의 눈치를 더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두 항공사는 대응 방침에 대해 주무 부처인 국토부와 협의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국토부는 EU 국가들에 슬롯 의무 소진 조건 유예를 요청한 상태다. 국토부 관계자는 “EU 국가 상당수가 현재 슬롯 의무 조건 유예에 긍정적인 입장을 밝힌 상황”이라며 “EU 측과 긴밀하게 협의하고 있다. 우려하는 상황은 나타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국토부는 코로나19 사태 발생 전 배정 슬롯을 80% 이상 소진하지 않는 국내외 항공사들의 슬롯을 회수해왔지만, 현재 코로나19 여파를 고려해 이를 유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