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6월 국내 조선소들과 100척 이상의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슬롯(선박 건조 공간) 예약 계약을 체결한 카타르가 오는 10월 첫 발주에 나설 전망이다. 발주 규모만 총 23조원에 달한다. 국내 조선업계는 카타르 발(發) 대규모 LNG선 수주 물량을 바탕으로 내년부터 실적 개선에 속도를 내겠다는 계획이다.
24일 조선해운 전문지 트레이드윈즈에 따르면 카타르 국영 석유회사인 카타르페트롤리엄(QP)은 오는 10월 한국조선해양, 삼성중공업(010140), 대우조선해양, 중국 후동중화조선 등 조선소 4곳에 LNG선을 발주할 계획이다. 카타르는 앞서 작년 4월 후둥중화조선과, 같은 해 6월 국내 조선 3사와 150척가량의 LNG선 슬롯 예약 계약을 맺었다. 슬롯 예약은 정식 발주 전 선박 건조 공간을 확보하는 절차를 말한다. 정확한 슬롯 계약 규모는 비밀 유지 협약에 따라 알려지지 않았으나, 조선업계에선 국내 조선 3사가 확보한 슬롯 규모는 각각 45척씩 총 135척으로 추정했다.
트레이드윈즈는 우선 올해 10월 20척의 LNG선이 발주될 것으로 내다봤다. 사전에 슬롯을 예약한 조선소 4곳 중 몇 곳을 골라 20척을 발주할 수도 있고, 4곳에 나란히 5척씩 발주할 가능성도 있다. 조선업계는 카타르가 이런 방식으로 앞으로 4~5년에 걸쳐 20~30척씩 LNG선을 발주할 것으로 전망했다.
다만 슬롯 계약 규모인 150척보다 적게 발주될 수도 있다. 2004년 카타르는 국내 조선 3사와 90척 이상 슬롯 예약 계약을 체결했으나, 실제 발주는 53척에 그쳤다. 당시 카타르는 2007년까지 4년간 총 7번에 걸쳐 LNG선을 발주했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슬롯 계약과 달리 본 계약에서 계약 조건이나 선박 대수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며 “통상 선주들이 슬롯을 넉넉하게 예약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카타르의 대규모 LNG선 발주는 카타르 동북부 노스필드 등 대형 가스전에서 생산하는 가스를 수출하기 위해서다. 카타르는 노스필드 프로젝트를 통해 연간 LNG 생산량을 기존 7700만톤(t)에서 2027년까지 1억2600만t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이를 수출하기 위해 LNG선도 74척에서 190척까지 늘릴 예정이다. 카타르는 현재 100척 이상의 LNG선을 맡아 운송을 책임질 선주사를 물색하고 있다. 국내에선 팬오션(028670), 대한해운(005880), SK해운, 현대LNG해운, 에이치라인해운 등이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장기 운송 계약 수주전에 참여하고 있다. 카타르는 선주사 선정을 완료하는대로 조선소에 선박을 발주할 계획이다.
국내 조선 3사는 이미 2년 치 이상의 일감을 확보한 상태다. 여기에 카타르 물량까지 수주한다면 앞으로 최소 5년 이상의 안정적인 일감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수익성도 좋다. LNG선은 대표적인 ‘고부가 가치 선박’으로 1척당 가격이 평균 2억달러(약 2300억원)에 달한다. 선박 크기에 따라 1000억원대 후반에서 4000억원대까지 다양하지만, 업계에선 2000억원대 중형급 LNG선을 카타르가 발주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카타르가 100척을 발주할 경우 국내 조선 3사가 챙길 수 있는 금액만 23조원 이상이다. 이는 삼성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의 올해 수주 목표 금액(18조원)을 합친 것보다도 많은 규모다.
조선업계는 이번 LNG선 건조를 통해 중국과의 격차를 더 벌릴 것으로 전망했다. 앞서 지난해 4월 중국은 한국보다 먼저 카타르로부터 최대 16척의 슬롯 예약 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한국이 중국보다 훨씬 더 많은 슬롯을 계약했으나, 건조 기술력 등에서 한국보다 한 수 아래였던 중국이 먼저 LNG선 슬롯 계약을 체결한 것을 두고 국내 조선업계는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조선업계는 중국이 세계적인 가스 소비국인 점을 카타르가 무시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추측했다. 국내 조선업계는 카타르가 발주하는 LNG선을 성공적으로 건조해 건조 능력을 다시 한번 인정받겠다는 계획이다.
조선업계는 카타르 대규모 LNG선 수주를 바탕으로 장기 호황을 의미하는 ‘슈퍼사이클’을 이어갈 전망이다. 올해는 선박 건조 비용의 20%를 차지하는 후판(두께 6㎜ 이상의 두꺼운 철판) 가격의 인상으로 적자가 불가피하지만, 작년 말부터 수주한 선박을 내년에 인도하기 시작하면서 흑자 전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국제해사기구(IMO)의 환경 규제로 인한 노후 선박 교체 수요까지 맞물리면서 수년간 선박 발주가 꾸준히 이어질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조선소들이 일감을 대거 확보했다는 것은 가격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뜻”이라며 “원자재 가격 상승분을 선박 가격에 반영해 재무 구조를 대폭 개선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