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034730)그룹 회장이 이끄는 대한상공회의소가 대기업이 인수·합병(M&A) 등에 필요한 자금을 원활히 조달할 수 있도록 직접 펀드를 조성하는 방안을 허용해달라고 정부에 건의하기로 했다. 일본 소프트뱅크가 비전펀드를 조성해 전 세계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것처럼, 국내 산업계도 금융자본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길이 열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5일 재계에 따르면 대한상의는 대기업이 투자자금 조달 목적으로 펀드를 조성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해달라는 건의서를 조만간 금융위원회 등 관계부처에 제출할 예정이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탄소중립 등으로 전 산업 구조가 격변하고 있는 지금, 신산업을 선점하기 위해선 대규모의 투자가 신속하게 필요하다”며 “개별 기업 차원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데 한계가 있는 만큼, 대기업이 M&A와 새로운 기술 확보를 위한 대규모 펀딩을 할 수 있도록 관련 규제를 완화해달라는 취지”라고 말했다.

이번 아이디어는 일본 소프트뱅크가 이끄는 비전펀드에서 착안된 것으로 알려졌다. 2017년 출범한 소프트뱅크 비전펀드는 세계 최대 벤처캐피털(VC)로 꼽히며 글로벌 스타트업 생태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산업자본이 펀드라는 형식으로 금융자본을 끌어다 투자하는 셈인데, 대한상의의 아이디어는 여기서 그 투자금을 스타트업이 아닌 각 대기업의 사업 확장과 기술 확보에 사용한다는 데에 차이점이 있다.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맡고 있는 최태원 SK그룹 회장./SK그룹 제공

최근 산업계는 조(兆)단위 투자를 이어가며 체질 개선과 사업 확장에 주력하고 있다. 삼성전자(005930)는 세계 반도체 1위를 수성하기 위해 올해 상반기 국내외 시설투자에만 23조원을 쏟아부었지만 여전히 비메모리 영역의 추가 투자가 필요한 상황이다. 배터리 업계의 경우 SK이노베이션(096770)이 5년간 17조원을, LG화학(051910)이 6조원을 투입한다. 해당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기업들은 기업공개(IPO)부터 합작사 설립, 기존 사업 지분 매각 등 가용수단을 총동원하고 있다.

대한상의는 대규모 펀드를 조성하고 운용할 여력이 있는 대기업을 대상으로 하되, 펀드로 모인 자금의 활용처는 제한을 두지 않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다. 사실상 전 산업이 4차 산업혁명의 영향을 받고 있는 만큼, 투자 가능한 사업군을 정해두는 ‘포지티브’ 방식보다는 원칙적으로는 모두 허용하는 네거티브 방식으로 가야 펀드의 효과를 높일 수 있다는 판단이다. 다만 펀드와 같은 집합투자를 위해선 자본시장법에 따라 금융위의 인가가 필요한만큼, 이미 자격을 갖춘 자산운용사와 협업하는 방식이 유력하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올해 말부터 일반지주회사도 기업형 벤처캐피털(CVC)를 설립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로 했지만, 대기업이 직접 자금 조달 창구로 활용하기엔 한계가 있다. 지주회사가 직접 출자해 지분 100%를 보유하는 완전자회사 형태로만 CVC를 설립할 수 있는데다, CVC 차입 한도도 일반 벤처캐피탈(자기자본의 900~1000%)보다 엄격한 자기자본의 200%로 제한돼 있다. CVC가 주체가 돼 펀드를 조성할 경우 외부 자금은 전체 조성액의 40%만 조달할 수 있어 대규모 투자는 어렵다. CVC가 총수일가 회사나 계열사에 투자하는 것도 금지돼 있다.

대한상의가 마련한 방안이 실제 실현되기까지는 여러 문턱을 넘어야 한다. 우선 금산분리 원칙이 훼손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공정위가 일반지주회사에 CVC 보유를 허용한 것은 1990년대 말 지주회사 체제가 도입된 이후 금산분리 원칙을 최초로 완화한 사례다. 정보통신(IT) 기업들이 인터넷은행의 대주주가 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인터넷은행법 역시 지난해 금산분리 원칙과 어긋날 소지가 있고 재벌의 은행 사금고화를 부추길 수 있다는 주장 때문에 국회에서 진통을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