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양궁이 또다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양궁 국가대표팀은 24일 도쿄올림픽 혼성 단체전(김제덕·안산)에서 우승한 데 이어 25일 여자 양궁 단체전(안산·장민희·강채영)에서도 금메달을 땄다.

특히 한국 여자 양궁은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33년 동안 한 번도 올림픽 무대에서 금메달을 놓치지 않고 9연패(連覇)를 달성했다. 올림픽에서 특정 종목이 9연속 우승을 달성한 사례는 수영 남자 400m 혼계영(미국)과 육상 남자 3000m 장애물(케냐)에 이어 한국 여자 양궁이 역대 세 번째다.

26일 열린 남자 양궁 단체전에서도 우리 대표팀(오진혁·김우진·김제덕)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만과 결승전에서 6대0으로 승리하면서 올림픽 남자 양궁 단체전에서 2연패에 올랐다. 도쿄올림픽 양궁 종목에서 대한민국은 혼성·여자·남자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모두 휩쓸었다.

◇ 車 설계에 활용하는 R&D 기술, 양궁 장비 점검에 활용

지난 25일 여자 양궁 단체 결승전이 열린 일본 도쿄 유메노시마공원 양궁장.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금메달이 확정되자 관람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지난 2005년 5월 대한양궁협회장에 취임한 뒤 16년째 협회를 이끌고 있는 정 회장은 최근 미국 출장을 마치고 양궁 대표팀을 격려하기 위해 일본을 찾았다.

정의선(앞줄 가운데) 현대차그룹 회장이 25일 일본 유메노시마 공원 양궁장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여자 양궁 단체전에서 양궁 여자 대표팀이 금메달을 따자 박수 치고 있다./연합뉴스

대한민국 양궁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40년 가까이 정몽구 명예회장과 정의선 회장 부자(父子)가 대를 이어 지원한 영향이 컸다. 정 회장 부자가 한국 양궁 발전을 위해 그동안 지원한 금액만 5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그룹의 양궁 후원은 정몽구 명예회장이 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 사장 시절인 1984년 시작됐다. 당시 열린 LA올림픽에서 한국 선수가 양궁에서 금메달을 딴 것을 본 정 명예회장은 “한국인이 세계 1등을 하는 종목인데 지원을 못 받아 경쟁에서 밀리는 일이 생겨선 안 된다”며 지원을 결심했다. 이듬해 정 명예회장은 양궁협회장을 지내면서 물심양면으로 양궁을 지원했다.

아버지에 이어 2005년 5월 대한양궁협회장에 부임한 정의선 회장도 5선을 연임하면서 16년 동안 양궁을 지원하고 있다. 선수 육성을 위해 초·중학교 장비 지원 사업에 나서는가 하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는 동호회 행사를 열면서 양궁 저변 확대를 위해서도 힘썼다.

현대차그룹은 한국 양궁 선수들이 실력을 겨룰 수 있도록 지난 2016년 총상금 4억5000만원의 ‘현대자동차 정몽구배 한국양궁대회’도 창설했다. 특히 지난 2019년 열린 ‘정몽구배 양궁대회’는 ’2020 도쿄올림픽'에 앞선 마지막 국내 대회인 만큼 16강전부터 결선이 열리는 KNN센텀광장에는 도쿄올림픽 양궁 경기장과 유사한 조건의 특설 경기장을 구현하며 눈길을 끌었다.

양궁 올림픽 대표팀의 최연소 선수 김제덕이 지난 20일 도쿄 유메노시마 공원 양궁장에서 훈련을 준비하고 있다./연합뉴스

현대차그룹은 선수들의 경기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그룹의 연구개발(R&D) 기술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장비의 품질은 물론 선수의 정신력을 강화하는 데 자동차 R&D 기술을 활용하자는 정의선 회장의 제안이 있었던 덕분이다.

현대차그룹은 경기 성적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활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신차 개발시 부품의 내부 균열 여부를 분석하는 비파괴검사 기술을 활용했고, 선수에게 꼭 맞는 활을 디자인할 수 있도록 자동차 설계에 활용되는 3D프린터 제작 기술도 이용했다. 50m 거리에서 화살을 쏴 화살의 불량 여부를 테스트하는 기기 ‘슈팅머신’ 역시 현대차그룹의 지원으로 제작됐다.

현대차그룹의 대대적인 지원은 다른 종목 선수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2016 리우 올림픽 당시 김연경 선수는 대한배구협회의 지원이 부족하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선수들을 위해 전용 휴게실도 마련해준 양궁협회의 지원에 대해 “많이 부럽다”고 했다.

지난 2016년 8월 브라질 리우 올림픽에서 한국 양궁대표팀이 정의선 양궁협회장을 헹가래 치고 있다./조선일보 DB

◇ 오직 실력으로 대표팀 선발…7개월 동안 3000여발 쏜 선수들

국가대표팀에 선발되기 전 이뤄지는 치열하고 공정한 경쟁 시스템, 거친 외부 환경에서도 최고의 경기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훈련 프로그램도 한국 양궁의 역사를 쓴 비결이다.

대한양궁협회는 선수 선발 과정에서 파벌이나 담합 등 불합리한 요소가 끼어들지 않도록 공정한 내부 경쟁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나이가 어리거나 경험이 부족해도 선발전에서 좋은 성적을 내면 국가대표로 선출된다. 오직 실력으로만 겨루는 것이다.

우리나라 양궁팀의 유별난 훈련 방식도 유명하다. 경기 집중력을 기르기 위해 야구장이나 군부대 등 소음이 큰 곳에서 활을 쏘기도 한다. 지난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중국 관중이 한국 선수들이 활을 쏠 때 호루라기를 불거나 페트병을 두드리며 방해하는 바람에 여자 개인전 우승에 실패하자 나온 자구책이다. 담력을 쌓기 위해 번지점프도 한다. 한때 선수들의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뱀을 풀어놓고 훈련을 한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세계 선수권대회를 앞둔 양궁 국가대표팀이 소음, 관중 적응 훈련을 하기 위해 잠실야구장에서 훈련하는 모습./조선일보 DB

양궁협회는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대표 선발의 공정성을 더 높였다. 그 결과 17살 국가대표(김제덕)가 탄생했고, 여자 단체전의 경우 9연패라는 역사적인 기록도 달성했다.

도쿄 올림픽 무대에 선 남녀 6명의 선수는 작년 10월부터 올해 4월까지 7개월 동안 세 차례 선발전, 두 차례 평가전을 거쳤는데, 이들이 토너먼트, 리그전, 기록전 등을 치르면서 쏜 화살만 3000여 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