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 수급에 비상이 걸리자 정부가 원전 3기의 가동 시기를 앞당기기로 했지만, 여전히 24기 중 6기가 멈춰있어 정비 중인 원전이 지나치게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력 수요가 가장 많은 여름에 이처럼 원전 정비가 몰린 것은 애초부터 필요한 전력량을 적게 예측했기 때문이지만, 원전 안전성에 흠집을 내기 위해 정비 기간을 늘린 데 따른 결과라는 지적도 나온다.

22일 한국수력원자력에 따르면 지난 21일부터 950메가와트(MW)급 고리4호기가 계획예방정비에 착수했다. 예상 정비 기간은 오는 12월 11일까지로 143일간이다. 이 기간 동안 고리4호기는 정기 검사를 받고 제어봉 제어계통 디지털 이중화, 저압터빈 분해점검과 지난 태풍 마이삭 후속조치인 송수전 전력설비개선 작업 등을 수행할 예정이다.

고리원자력본부 전경./고리원자력본부 제공

이에 따라 현재 정비 중인 원전은 24기 중 한빛4·5호기, 한울3·4호기, 고리3·4호기, 월성3호기 등 총 7기가 됐다. 전체의 30% 가까이가 멈춰있는 셈이다. 지난 21일 원자력안전위원회의 허용을 받아 23일 재가동에 들어가는 월성3호기를 제외해도 6기로, 전체의 25%다. 한울3·4호기는 오는 8~9월중 정비가 끝날 예정이지만, 나머지 원전은 연말 이후다. 한빛4호기의 경우 2017년 5월 정비를 시작해 4년째 재가동이 지연되고 있고, 한빛5호기도 지난해 4월부터 1년 넘게 멈춰있다.

전문가들은 원전 4기 중 1기 꼴로 정비를 진행 중인 현 상황은 일반적이지 않다고 보고 있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보통 20개월에 한번 정기 검사를 실시하는데, 짧게는 한달 반, 길게는 세달가량 진행된다”며 “평균 두달로 잡으면 비율상 3~4개가 정비 중이어야 정상인데, 지금은 그 두배가 정비 중인 셈”이라고 말했다.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역시 “보통 원전이 제대로 돌아가는 상황에선 이용률이 85% 정도”라며 “특히 여름 성수기엔 정비 시기를 조정해 원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데, 지금은 쉬고 있는 원전이 많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원전 정비가 몰려 전력난 우려가 제기되는 현 상황은 기본적으로 정부가 수요 예측을 잘못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해 말 발표한 9차 전력수급 기본계획에서 올해 여름 최대 전력 수요를 90GW로 전망했다. 이번 전력수급 기본계획은 지난해부터 2034년까지 15년간의 전력 계획을 담은 것이다. 그러나 이달 1일 발표한 ‘여름철 전력수급 전망 및 대책’에서 정부는 올해 8월 둘째 주 최대 전력 수요가 94.4GW에 달할 것으로 예측했다. 7개월 만에 최대 전력 수요가 4.4GW 늘어난 셈이다. 현재 멈춰있는 원전 7기의 총 설비용량은 5.6GW 규모다.

실제 전력 공급 예비력은 뚝뚝 떨어지고 있다. 전력거래소는 “이날 최대전력 발생 시간은 오후 4~5시, 최대 전력은 91.1GW로 예상된다”며 “이 시간대의 공급 예비력은 7.8GW(공급 예비율 8.6%)”라고 했다. 전력당국은 예비력이 5.5GW 이상이면 정상 상태로 판단하지만, 발전기 고장이나 이상고온 등 돌발 상황까지 대비하려면 예비력은 10GW 이상, 예비율도 10% 이상이어야 안정적인 수준으로 평가된다. 주한규 교수는 “지난해의 경우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경기가 위축되면서 전력 수요가 예외적으로 낮았지만, 올해는 코로나19 회복 등을 염두에 두고 전망을 높게 잡았어야 했다”며 “제대로 예측했다면 원전 정비 일정을 조정해 전력난에 대응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탈원전 기조를 뒷받침하기 위해 원전 정비 기간을 무리하게 늘리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원전 전문가는 “발견된 결함 중 일부는 당장 원전을 가동하는데 큰 문제가 없어 향후 정비해도 되는데 정부가 규제를 지나치게 강하게 적용하고 있고, 이 때문에 결국 불필요하게 멈춰있는 원전이 많다”며 “결국 원안위는 원전이 없으면 전력 공급이 부족하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는 ‘자충수’를 두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원전 전문가도 “무리하게 안전성 기준을 높게 잡아 정비를 오래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결국 원전의 안전성에 흠집을 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원전 정비 일정이 늘어지고 겹치는 상황이 계속될 경우 전력 위기는 가중될 수밖에 없다. 주한규 교수는 “공급량에 실시간으로 잡히지 않는 태양광 발전 시설 등 덕분에 가까스로 버티고 있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 태양광 발전이 충분히 되지 않는다면 블랙아웃(대정전) 위기가 심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범진 교수는 “정부가 전력 수요를 낮게 예측하면서 전력 위기가 매년 발생하고 있다”며 “발전 설비를 많이 지어 전력이 남을 때의 손해보다 전력이 부족해 정전 등으로 발생하는 손해가 훨씬 크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