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한 컴퓨터그래픽(CG) 기술로 사람보다 더 사람 같다는 평이 나오는 ‘버추얼 인플루언서(가상 유명인)’가 글로벌 시장에서 영향력 있는 마케팅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국내에서는 신뢰가 중요한 업계 특성상 모델 기용에 보수적인 금융업체 광고에까지 ‘가상 모델’이 등장해 주목을 받고 있다.
10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신한생명과 오렌지라이프의 통합법인 신한라이프는 지난 1일 출범하면서 첫 광고를 공개했다. 신한라이프 시작을 장식한 광고모델은 로지(22). 그는 광고 속에서 숲속과 도심, 지하철 등을 오가며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이 영상은 공개 1주일여만에 유튜브 조회 수가 83만회를 넘기는 등 인기를 끌고 있다.
이 광고는 모델 로지가 실제 사람이 아닌 가상 인간이라는 점이 알려지며 화제를 모았다. 지난해 8월 싸이더스 스튜디오엑스가 만든 가상 인간 로지는 3만명이 넘는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보유한 인플루언서다. MZ세대(밀레니얼+Z세대, 1980년대~2000년대 초반 출생)가 선호하는 외모와 세계여행·요가·에코라이프 등 취미를 갖춘 것으로 설정됐다. SNS에서 실제 사람처럼 활동하던 로지는 지난해 12월 가상 인물임을 밝혔는데, 이전까진 “실제로 만나보고 싶다”는 댓글이 달릴 정도로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찾기 힘들다.
로지와 같은 가상 인플루언서를 활용한 마케팅 시장 규모는 전 세계적으로 점차 커지는 추세다. 미국의 시장조사 업체인 비즈니스 인사이더 인텔리전스에 따르면, 기업이 인플루언스에 쓰는 마케팅 비용은 지난 2019년 80억달러(약 9조원)에서 오는 2022년 150억달러(약 17조원)로 2배 가량 늘어날 전망이다. 이 중 상당 부분은 가상 인플루언서가 차지할 것이라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최근 등장한 가상 인플루언서는 기술의 발달로 사람과 구분이 어려울 정도이고 사람이 갖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CG로 모든 장면을 연출할 수 있어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마케팅이 가능하다. 또 실제 사람과 달리 아프거나 늙지 않아 활동기간이 긴 데다, 사생활 논란에 휘말려 광고가 중단될 위험도 적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가상 인플루언서는 미국 스타트업 ‘브러드(Brud)’가 만든 릴 미켈라(Lil Miquela·19)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거주하는 브라질계 미국인으로 설정된 그는 300만명이 넘는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는데, 광고용 포스팅 단가가 8500달러(약 976만원)로 한 해 수익만 130억원에 이른다. 샤넬, 캘빈 클라인 등 명품 브랜드 모델로 활동하며 최근엔 팝스타 레이디 가가 등이 소속된 할리우드 3대 에이전시 CAA(Creative Artists Agency)와 계약했다.
일본 이케아 하라주쿠점 광고 모델로 유명해진 일본의 이마(Imma)도 일본 스타트업 AWW가 만든 가상 인플루언서다. 광고 속 이마는 하라주쿠 매장에서 3일간 먹고 자며 요가와 청소를 하는 등 일상을 보낸다. 인간 모델로는 실제로 실행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이마는 34만여명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으며, 지난해 7억원의 수익을 냈다.
국내에서도 가상 인플루언서가 점점 늘어나는 분위기다. LG전자(066570)는 올해 초 가상 인간 ‘김래아’를 만들어 세계 최대 가전박람회인 CES 온라인 콘퍼런스 무대에 세웠다. 미래에서 온 아이라는 뜻의 김래아는 올해 23살로 싱어송라이터 겸 DJ라는 설정이다. 삼성전자(005930) 브라질 법인이 직원 교육을 위해 만든 가상 인간 ‘샘’ 역시 국내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삼성 걸’로 불리며 뜨거운 반응을 얻기도 했다.
광고업계 관계자는 “과거 사이버 가수 아담 등은 누가봐도 인간이 아닌 어색한 느낌이 강했다면, 최근 만들어진 가상 인간은 실제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해 분간이 어려울 정도”라며 “코로나19 장기화로 가상 인물 노출도가 높아져 이질감이 줄었고, 특히 MZ세대를 중심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