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배터리 업체인 중국 CATL은 사용량 기준으로 작년까지 4년 연속 전기차 배터리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이런 위상을 넘어 배터리 소재에서부터 장비와 자율주행차까지 미래 전기차 생태계 구축에 나섰다. ‘이코노미조선’은 이번 커버 스토리에서 CATL이 꾸리는 전기차 생태계를 조망하고, 기술을 추격당하는 한국 배터리 기업과 우리 정부에 대한 국내외 전문가의 조언을 들었다. [편집자 주]
독일 메르세데스-벤츠(이하 벤츠)는 올해 하반기에 선보이는 최고급 전기차 세단 ‘EQS’에 중국 전기차 배터리 업체 CATL이 개발한 배터리를 장착한다. 니켈과 코발트, 망간을 원료로 한 삼원계(NCM) 811 배터리로, 용량은 108(킬로와트시)에 달한다. 이 차의 주행거리는 770㎞, 충전 속도는 기존보다 2배 이상 빨라 테슬라 ‘모델 S’ 등 경쟁차의 자리를 위협할 것으로 예상된다. 벤츠의 최고급 전기차에 CATL의 배터리 시스템이 탑재되는 건 기술력이나 안전성 측면에서 상징성이 크다. 저가와 물량 공세를 무기로 글로벌 점유율을 높였던 중국 업체가 자동차 강국인 독일, 그것도 최고급 브랜드 벤츠에 제품을 공급하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한국 입장에선 뼈아픈 일이기도 하다. 2019년 벤츠 역사상 처음 선보인 순수 전기차 ‘EQC’에는 LG화학(현 LG에너지솔루션)의 파우치형 배터리가 탑재됐다. 불과 2년 만에 CATL이 이 자리를 꿰찬 것이다.
벤츠의 모회사 다임러는 지난해 8월 벤츠의 전동화를 지원할 첨단 배터리 기술 개발에 CATL과 협력하기로 하면서 “CATL과 전략적 파트너십의 다음 단계에 진입했다”고 밝힌 바 있다. 벤츠는 CATL의 배터리 시스템을 통해 ‘일렉트릭 퍼스트(Electric First)’ 전략을 가속하고 있다며 향후 승용차와 밴(VAN·다인승 자동차) 등에 기존 모듈을 제거하고 셀을 배터리에 통합하는 ‘CATL 셀투팩(CTP·Cell to Pack)’ 설계를 적용한다고 밝혔다. 이는 다임러가 CATL을 단순한 배터리 공급 업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차세대 전동화 전략의 핵심 파트너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CATL도 독일 완성차 시장을 겨냥해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CATL은 2019년 10월 독일 중부 튀링겐주(州) 에르푸르트에서 배터리 공장·연구시설 착공에 들어갔다. CATL이 해외에 짓는 첫 번째 공장으로, 유럽 전역에 배터리를 공급하는 전진 기지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원래 CATL은 2억4000만유로(약 3312억원)를 이 시설에 투자하겠다고 밝혔지만, 계획보다 7.5배 증액한 18억유로(약 2조4840억원)를 5년간에 걸쳐 투자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이곳에서만 2000여 개의 일자리가 새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로이터와 독일 자동차 전문 매체 일렉트라이브에 따르면 이르면 올해 말 CATL의 에르푸르트 생산 라인이 가동되면 14(기가와트시)의 배터리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된다. 생산 라인이 증설되는 2025년에는 연간 생산 능력이 최대 100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글로벌 2위 LG에너지솔루션의 연간 글로벌 전기차용 배터리 사용량(33.5)의 3배에 달하는 수치다. CATL은 이 공장에서 생산된 배터리를 BMW와 폴크스바겐에도 공급한다.
삼성SDI와 BMW 10년 독점 계약 깨
CATL은 설립 초기부터 글로벌 완성차 업체와 협력하며 해외 시장 진출을 추진했다. 설립 초기인 2012년 BMW와 손을 잡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중국 관영 일간지 증권시보에 따르면 쩡위췬 CATL 회장은 당시 800쪽이 넘는 BMW의 까다로운 요구 사항을 맞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럼에도 해외 영토 확대는 쉽지 않았다.
2018년 3월 세계 최대 완성차 업체 폴크스바겐의 전동화 로드맵 협력사로 선정되면서 CATL은 해외 시장으로 보폭을 넓히기 시작했다. 2025년까지 80종의 전기차 모델, 2030년까지 300종의 하이브리드 또는 전기차 모델을 출시하려는 폴크스바겐의 중장기 계획에 CATL이 핵심 파트너로 선정된 것이다. CATL은 넉 달 뒤인 2018년 7월 리커창 중국 총리가 독일을 방문하는 동안 에르푸르트 공장 건립 소식을 발표하며 유럽 시장 공략의 신호탄을 쏜다.
당시 CATL은 BMW와 40억유로(약 5조5200억원)에 달하는 배터리 공급 계약을 맺었다. 에르푸르트 공장에서 만들어 현지 BMW 공장에서 생산하는 전기차용으로 15억유로(약 2조700억원)어치를 납품하기로 했다. BMW는 2009년부터 삼성SDI와 사실상의 독점 계약을 유지했는데, 이 구조가 깨졌고 그 주인공이 후발 주자인 중국 업체라는 점에서 국내 배터리 업계 관계자들의 충격이 컸다. 심지어 BMW는 2019년 11월 CATL 배터리 주문량을 73억유로(약 10조740억원) 규모(2020~2031년)로 늘렸다. 당시 BMW의 배터리 공급사로 CATL과 함께 선정됐던 삼성SDI의 공급 계약 규모(29억유로)의 2.5배를 웃도는 수준이었다.
유럽은 중국을 제치고 2020년 세계 최대의 전기차 시장으로 부상했다. 독일의 시장 분석 업체 마티아스 슈미트에 따르면 지난해 유럽 주요 시장에서 신규 등록된 전기차는 133만 대로, 중국(125만 대)을 앞질렀다. 유럽을 핵심 시장으로 본 CATL의 투자 결정이 제대로 맞아떨어진 셈이다. 외신들은 거대 전기차 시장으로 성장할 북미 지역도 CATL이 눈여겨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CATL은 2017년 미국 디트로이트에 판매·서비스 법인을 설립했고, 마티아스 젠트그라프 CATL 유럽법인 대표는 2019년 9월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특정 시점에 북미 시장에 불이 붙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CATL은 글로벌 완성차와의 협업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글로벌 완성차 업체의 중국 공장에서 생산되는 전기차용 배터리 납품이 많지만 이들 업체의 글로벌 생산기지에도 공급하는 쪽으로 협력 공급망을 확대하고 있다. CATL은 2019년 5월 볼보의 전기차 브랜드 폴스타에 향후 10년간 사용될 배터리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2019년 7월에는 도요타와 전기차용 리튬 이온 배터리 공급 계약을 했다. 2020년 7월 혼다와도 포괄적인 전략 동맹을 맺기로 합의했다고 밝히며 배터리 공동 개발에 나섰다. 현대차의 차세대 전기차 플랫폼인 ‘E-GMP’를 기반으로 2023년 이후 출시되는 전기차 2개 모델에 CATL의 배터리를 공급할 예정인 것으로 전해졌다.
中 인센티브, 빠른 투자, 과감한 R&D 삼박자
CATL이 글로벌 완성차 업체의 선택을 받는 건 중국 정부의 자국 산업 보호를 바탕으로 뛰어난 기술력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블룸버그 인텔리전스에 따르면 2011년만 해도 중국에서 판매된 신에너지차(NEV)는 1014대에 그쳤지만, 쩡위췬 회장은 자동차용 리튬 이온 배터리가 성장할 것으로 보고 사업에 나섰다. 때마침 중국 정부가 NEV 보조금을 주면서 수요가 불어나기 시작했던 때다. 2016년과 2017년 NEV에 대한 중국 정부 보조금만 120억달러(약 13조5600억원)에 달했다.
중국 정부 정책에 따라 해외 자동차 업체는 중국에서 생산한 배터리를 사용하도록 권장됐고, 삼성·LG·SK 등 외자 기업이 중국공장에서 만든 배터리를 배제하는 보호주의 정책이 펼쳐졌다. 이런 상황에서 CATL은 기술 개발에 매진했다. 2019년 기준으로 연구개발 직원(5364명)은 전체 임직원의 5분의 1을 차지했다. 중국 시장조사 업체 이퀄오션은 “중국 정부의 NEV 산업 정책과 회사의 기술적 배경·경험을 결합해 CATL은 신흥 배터리 거물로 성장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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