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일가가 고(故) 이건희 회장 보유 재산의 상속을 마무리했지만, ‘이재용 체제’가 삼성그룹 전반에 뿌리내리기 위해선 넘어야할 산이 많다. 당장 불법승계 의혹 재판 등 사법 리스크가 남아 있다. 또 국회에 계류 중인 ‘보험업법 개정안(일명 삼성생명법)’이 어떻게 개정되느냐에 따라 그룹 지배구조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수감 중인 이재용 삼성전자(005930) 부회장이 대규모 투자를 결정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재계의 우려도 적지 않다.
4일 재계와 법조계에 따르면 삼성물산(028260)과 제일모직 불법 합병과 시세조종 혐의 등에 대한 두번째 공판이 오는 6일 열린다. 검찰은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를 위해 이 부회장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부당하게 지시·승인했다고 보고 있다. 이 부회장의 혐의에는 삼성바이오로직스(207940)의 분식회계로 인한 주식회사외부감사법 위반도 포함됐다. 삼성바이오 분식회계 의혹은 이 부회장에 대한 수사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기도 하다.
이 부회장 측은 이런 의혹에 대해 “인정할 수 없다”며 부인하고 있다. 재계와 법조계는 재판 내용이 복잡하고 방대해 최종 판결까지는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고 있다. 재계와 정치권, 종교계, 지자체 등 각 계층에서 이 부회장의 사면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이 부회장이 풀려난다고 해도 이번 재판 결과에 따라 재수감될 가능성도 있다.
재계 관계자는 “검찰이 워낙 방대한 자료를 가지고 이 부회장의 혐의 입증을 자신하는 상황이라 재판이 길어질 것으로 본다”며 “이번에 국정농단 사태 재판에 대한 사면을 받는다고 해도 완전한 자유의 몸이 아닌 것”이라고 했다.
이 부회장은 ‘프로포폴 불법투약’ 의혹 사건에도 연루돼 있다. 이 부회장의 요청으로 지난 3월 26일 검찰 수사심의위원회가 열린 이후 검찰이 한 달이 넘도록 기소 여부를 결정하지 않고 있다. 당시 수사심의위원회는 공소 제기 안건에 7대 7 찬반 동수를 내려 검찰의 기소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다. 검찰이 기소하면 이 부회장은 옥중에서 불법 승계 의혹에 이어 프로포폴 의혹까지 두 가지 재판을 동시에 준비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이 삼성생명(032830)을 겨냥해 만든 ‘삼성생명법’은 삼성 지배구조를 흔들 이슈로 꼽힌다. 삼성생명법은 보험사의 계열사 주식 보유액을 ‘취득원가'가 아닌 ‘시가’로 평가해 보유 한도를 총자산의 3%로 제한하는 내용이 골자다. 이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주식 보유분을 시가로 평가하고 총자산 3% 초과분은 법정 기한 내에 처분해야 한다. 보험사의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계열사 주식가치 반영 방식을 시가로 변경하자는 취지지만, 규제를 적용받는 보험사가 삼성생명 뿐이라 ‘삼성생명법’으로 불린다.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지분 8.51%(5억815만7148주)를 들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삼성생명의 총자산은 310조원이다. 개정안이 통과하면 삼성생명은 약 9조33000억원을 초과하는 삼성전자 지분을 처분해야 하는데, 이 때 시장에 나올 삼성전자 매물은 30조원이 넘는다. 국내에서는 이 매물을 받아낼 수 있는 투자자가 많지 않아 대부분 외국인 투자자가 이 지분을 가져갈 가능성이 크다.
현재 삼성그룹은 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로 이어지는 지배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부회장이 삼성물산 최대주주로 그룹 전체를 경영하는 체제다. 이 부회장은 지난달 30일 이건희 회장 보유 주식 가운데 삼성생명 지분을 2075만9591주(10.38%) 상속 받으면서 개인 최대주주가 됐다. 삼성전자 대주주인 삼성생명의 지분을 확보하면서 삼성전자 지배력도 강화된 것이다. 그런데 삼성생명법이 통과하면 그만큼 이 부회장의 삼성전자 지배력이 약화된다. 시장에서는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을 삼성물산에 넘기는 방안이 거론된다. 다만 30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이 소요된다는 점에서 이런 방안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이 부회장은 옥중에서 삼성전자의 국내외 반도체 투자 건도 결정해야 한다. 삼성전자는 미국 오스틴 등지에 신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 신설을 검토 중이다. 국내 평택캠퍼스에는 P3 라인 투자 결정을 앞두고 있다. 투자 금액은 오스틴 공장이 약 20조원, 평택 P3 라인이 약 50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이 부회장이 그간 상속과 두 건의 재판 준비 등에 치중했을 것을 고려하면 신규 투자 건은 검토를 못 했거나 경영진에게 제대로 보고조차 받지 못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업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처한 현실을 고려할 때 당초 업계의 예상보다 반도체 투자 결정 시기가 늦춰질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