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공장’ 중국을 중심으로 구축된 글로벌 밸류 체인(GVC·Global Value Chain)이 변곡점을 맞고 있다. 기존 저비용 고효율을 위해 세계 각국에 있는 기업이 분업해 원자재 및 부품을 조달하고 제품을 생산했다면, 이제는 국가 간 갈등, 코로나19, 지진 등 예상치 못한 리스크를 대비해 부품 조달, 제품 생산 등을 다변화하고 있다. GVC의 유연성, 안정성, 신뢰성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이코노미조선’은 중국이 20년 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후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한 과정과 현재 미국과 중국 두 진영으로 나뉘고 있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 현상을 분석했다. [편집자 주]

그랜저·쏘나타를 생산하는 현대차 아산공장은 4월 12~13일 가동을 중단했다. 차량 전기장치 부품을 제어·관리하는 부품 재고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코로나19) 사태로 빚어진 공급망 차질 문제였다. 네덜란드 반도체 기업 NXP가 현대차에 납품하는 이 부품에는 대만 TSMC가 생산하는 차량용 반도체 칩(MCU·마이크로 컨트롤 유닛)이 탑재된다. 최근의 반도체 쇼티지(shortage·공급 부족) 사태에는 중국 중심의 글로벌 공급망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자동차를 생산하고, 가장 많은 가전제품을 공급하는 중국에서 수요가 폭발하며 사재기까지 하면서 TSMC가 MCU를 제때 납품하지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MCU의 평균 가격은 1달러. 현대차는 1달러짜리 부품을 제때 조달하지 못해 연간 생산액 7조8000억원의 아산공장 자동차 생산라인을 멈춰 세웠다. 자동차뿐이 아니다. 반도체 쇼티지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가리지 않고, 스마트폰·TV·폐쇄회로TV·의료기기 등 공장 라인이 멈춰 서는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전 세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장의 60%를 장악한 TSMC라는 특정 기업에 과도하게 의존한 공급망의 취약성과 중국 중심 글로벌 공급망의 부작용이 부각되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분야 석학인 요시 셰피 MIT대 교수는 이런 현상을 ‘채찍 효과(bullwhip effect)’에 비유했다. 셰피 교수는 “코로나19로 부품 주문을 줄인 기업들이 경제 상황이 되돌아왔을 때 바로잡으려고 해도 이미 늦었다”고 했다. 부품 공급에 있어 예측하지 못한 수요의 작은 변동은 마지막 완제품 생산 시 큰 변화를 가져온다. 채찍을 잡은 부분에 작은 힘을 가해도 끝부분에 큰 힘이 전달되는 것 같은 효과다.

◇'세계 공장' 중국

20년 전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 ‘세계 공장’으로 부상하며 형성된 중국 중심 글로벌 밸류 체인(GVC·Global Value Chain)이 변곡점을 맞고 있다. GVC란 세계 각국에 있는 기업들이 분업해 제품을 기획하고 원자재 및 부품을 조달, 가공, 생산해 최종 고객에게 전달하는 글로벌 공급망을 뜻한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는 수출주도형 경제체제로 글로벌 공급망에 올라타며 ‘아시아 4마리 용’이란 신화를 만들었다. 1995년WTO 출범과 함께 관세 인하, 교역과 운송비용이 낮아지고, 1990년대 다국적기업들이 해외 공장을 세우는 현지화에 속도를 내면서 글로벌 공급망 구축이 가속화됐다.

이 흐름에 날개를 단 게 2001년 중국의 WTO 가입이다. 중국은 저렴한 인건비와 각종 세제 혜택, 14억 인구의 잠재 소비 시장을 앞세워 해외 기업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다국적기업은 이익을 챙기고 중국은 ‘세계 공장’으로 떠오르며 일자리를 창출하는 윈윈 구조였다.

중국이 세계 수출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차지한 품목 수는 2019년 1759개로 2002년(787개) 대비 123% 증가했다. 2, 3위인 독일과 미국을 합친 것보다 많다. 중국을 최대 교역대상국으로 삼는 국가는 한국 등 64개국으로, 미국을 최대 교역대상국으로 둔 38개국을 크게 웃돈다. 세계 제조업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도 28.7%(2019년)로 2000년 8.2%의 3배가 넘는다. 중국은 단순 조립 공장을 벗어나 반도체 같은 중간재와 자본재 등 핵심 품목까지 자국 내에 확보하는 홍색공급망 구축에도 나섰다.

중국이 2010년 일본과의 센카쿠열도 분쟁 때 세계 시장의 60% 이상을 장악한 희토류 수출을 제한하고, 2017년 주한미군의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로 한국에 경제보복을 가하면서 국수주의에 휘둘리는 중국 중심 글로벌 공급망의 문제가 부각되긴 했지만 이를 본격적으로 재편하려는 움직임은 미⋅중 무역 전쟁과 2020년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면서 빨라지고 있다.

작년 초 코로나19 진원지인 우한을 시작으로 중국에 취해진 봉쇄조치로 중국 제조업은 작년 1분기 14.1% 추락했다. 이 여파로 같은 기간 글로벌 제조업이 6% 위축됐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강타한 2008년 4분기 -7%에 이어 최대 폭 감소다. 올 들어선 중국이 1분기에 사상 최대인 18.3% 성장을 하며 글로벌 공급망에 쇼티지 현상의 단초를 제공했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세계 백신 생산의 60%를 차지하는 인도의 최근 백신 수출 통제, 세계 교역 12%를 차지하는 수에즈운하가 올 3월 일주일 폐쇄된 사건, 올해 초 대만의 가뭄과 TSMC 화재 등은 중국은 물론 특정 국가, 특정 기업, 특정 물류망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글로벌 공급망의 취약성을 확인시켰다.

GVC 핵심 가치가 과거 저비용 고효율에서 유연성, 안정성, 신뢰성으로 옮겨지게 된 배경이다. 한 지역에서 대량생산하는 게 아닌 다변화를 통한 수요지 중심의 공급망을 구축해 리스크를 최소화하려는 것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동맹을 통해 중국을 글로벌 공급망에서 배제하는 디커플링(탈동조화) 작전을 강화하고 있다. 지난 2월 반도체·배터리·희토류·의약품 등에 대한 공급망 재검토 행정명령, 3월 쿼드(미국·일본·인도·호주) 화상 정상회의에서 희토류와 배터리 공급망 협력, 4월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에서 반도체와 6G(6세대 이동통신) 공급망 협력 등은 글로벌 밸류 체인을 미국과 중국 두 진영으로 갈라놓을 것이라는 관측을 낳는다. 유럽연합(EU)도 2025년까지 배터리 자립, 2030년까지 반도체 생산 세계 점유율을 지금의 2배인 20%로 높이는 등의 구상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선진국의 제조업 회귀 전략과 함께 인도·베트남·멕시코 등 넥스트 차이나 후보군도 제조업 육성으로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가세하고 있다.

◇무역 전쟁, 기술 전쟁 이어 공급망 전쟁

김기찬 가톨릭대 경영학부 교수는 “국가 간 경제 전쟁은 무역 전쟁, 기술 전쟁을 넘어 공급망 전쟁으로 이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카를로스 코르돈 스위스 IMD 비즈니스스쿨 교수는 “세계 정부와 기업은 글로벌 공급망을 어떻게 지역적으로 만들지 고민하고 있다”며 “미국은 멕시코와 캐나다에 공급망을 구축할 수 있고, 아시아 국가들은 중국 외의 공급망을 찾아 나설 수 있다”고 말했다. 코르돈 교수는 “많은 시간이 걸리며 당장 엄청난 변화를 기대할 순 없지만, 지역적인 차원에서 보면 어느 정도 변화가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생산까지 선진국에서 하겠다는 전략의 변화는 설계와 연구개발은 선진국, 생산은 개발도상국에서 집중하던 구조를 깨며 GVC 변화를 앞당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국 중심의 GVC가 갖는 저비용 고효율성 때문에 변화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만만치 않다. 셰피 교수는 “우수한 공급자들로 구성된 방대한 생태계를 갖춘 중국을 떠나는 건 힘들 것”이라며 “라벨에 ‘메이드인차이나’를 붙이지 않기 위해 마지막 단계를 이동할 수는 있지만 핵심 공급망은 계속 중국에 머물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ESG(환경·사회·지배구조)가 메가트렌드로 부상하면서 다국적기업들로서는 인권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중국 공급망과 거리 두기가 불가피해질 것으로 보인다. 영국 경제 잡지 ‘이코노미스트’는 “다국적기업들에 인권 등을 중시하는 자국의 소비자와 중국의 거대 시장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시기가 오고 있다”고 했다. 글로벌 공급망이 20년 만에 변곡점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