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현지시각) 오후 3시 40분 프랑스 르망 라 샤르트 서킷. 준비된 레이싱카에 드라이버들이 탑승하자 수많은 관중이 기립했다. 타이어를 달구기 위한 '워밍업 랩'을 지켜보기 위해서다.

선두에 있는 차량들이 먼저 출발하자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4분여 뒤 한 바퀴를 돌고 온 차량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두 차량이 출발선을 통과한 4시 정각, 배기음이 공기를 가르며 귀에 때려 박히자 환호성은 최고조에 달했다. 시작을 알리는 장내 아나운서의 외침과 함께 가장 혹독한 레이스가 막을 열었다. 르망24 내구레이스가 개막한 현장이다.

13일(현지시각) 프랑스 르망 라 사르트 서킷에서 르망 24시 내구레이스에 참가한 제네시스의 GMR-001 차량이 웜업을 마치고 본격적인 레이스를 시작하고 있다. /김지환 기자

르망 24는 프랑스 파리 남서쪽으로 약 200㎞ 거리에 있는 소도시 르망에서 1923년부터 진행되는 자동차 경주 대회다. 국제자동차연맹(FIA)이 주관하는 세계 내구 레이싱 대회(WEC) 세 번째 라운드인 이 대회는 24시간 동안 팀의 드라이버들이 번갈아 13.6㎞의 트랙을 도는 방식으로 경기가 치러진다.

차량 한 대마다 3명의 드라이버가 나눠 운전을 한다. 꼬박 하루가 걸리는 만큼 차량의 속도뿐만 아니라 안정성, 내구성이 중요해 세계 유명 브랜드들의 격전지로 꼽힌다.

◆8달 만에 개발된 엔진… 완주로 기술력 입증

현대차그룹 고급 브랜드 제네시스는 이번 대회에 하이퍼카 GMR-001 2대(#17, #19)를 앞세워 첫 출전했다. 지난해에는 한 단계 아래 급인 LMP2에 출전한 바 있다.

GMR 하이퍼카에 탑재된 엔진은 3.2L V8 터보 엔진인 G8MR이다. 현대차그룹이 월드 랠리 챔피언십(WRC)을 거치며 쌓은 기술력과 노하우를 토대로 개발됐다.

14일(현지시각) 오후 3시쯤 프랑스 르망 라 사르트 서킷에 마련된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팀의 피르 거라지 모습. GMR-001 #19 차량이 피트 스톱을 진행하고 있다. /김지환 기자

양산 엔진 개발에는 5년이 걸리지만, G8MR을 개발하는 데는 설계부터 첫 엔진 시동까지 8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양산 엔진보다 40㎏ 이상 가볍고, 현대차그룹의 엔진 중 가장 높은 출력을 낸다.

김종혁 제네시스 파워트레인 담당 책임은 "(엔진 개발에) 필요한 부분만 집중해 역량을 쏟았다"고 말했다.

14일(현지시각) 오후 3시쯤 방문한 제네시스의 피트 거라지(Pit garage)에선 피트 스톱(정비)이 한창이었다. 24시간 동안 트랙을 도는 경주용 차량은 평균 30회 피트 스톱을 한다. 이번 피트 스톱은 경기 종료 1시간을 앞두고 진행된 것이었다.

14일(현지시각) 프랑스 르망 라 사르트 서킷에서 개최된 르망 24시 레이스가 마무리되자,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 정비사 등 스텝들이 서로를 격려하고 있다. /김지환 기자

4~5명의 정비사들은 50초 만에 타이어를 교체하고, 주유까지 마쳤다. 경기 막바지였고 순위가 사실상 결정된 상황이어서 긴장감이 다소 떨어졌지만, 스텝들은 여전히 차량의 데이터를 분석하는 등 완주를 위해 집중하고 있었다.

4시쯤 #19 차량이 마지막 랩에 진입하자, 정비사들이 피트 거라지에서 트랙쪽으로 나와 서로를 격려하기 시작했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팀(GMR)은 4분 뒤 공식 목표였던 완주에 성공했다. 엔진 개발부터 560여일 만에 달성한 쾌거였다. #17 차량이 리타이어(경주 포기)했지만, #19 차량이 8분간 멈추는 우여곡절 끝에 레이스를 13위로 마무리한 것이다.

#19 차량은 대회 이틀간 서킷 327랩을 돌았고, 총 주행거리는 5068㎞ 이상으로 집계됐다. 최고 랩타임은 3분 27초 645로, 대회에 출전한 하이퍼카 18대 중 15번째에 해당한다. 평균 속도는 시속 220.59㎞였다. 이번 대회에 투입된 인력은 정비사와 드라이버 등 111명이다.

13일(현지시각) 프랑스 르망 라 사르트 서킷에서 열리는 르망 24시가 시작되기 전 진행된 그리드 워크 행사에서 관람객들이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팀의 GMR-001 차량을 관람하고 있다. /김지환 기자

◆유럽 한복판에 걸린 태극기… 아시아 모터스포츠 확장

올해 르망 24시에서 제네시스는 유럽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경기 시작 전에 열리는 행사인 그리드 워크(트랙에서 출전 차량을 보고 사진을 찍는 등의 행사)에선 마그마 리버리(도색·스폰서 로고·그래픽 패턴 등 레이스카에 적용되는 고유의 외관 디자인)가 담긴 GMR 차량 주변으로 백여명의 관중이 몰렸다. 제네시스 깃발을 손에 든 유럽인들은 차량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데 여념이 없었다.

백미는 태극기였다. 13일 르망 24시 103년 역사 최초로 태극기가 경기장에 걸렸기 때문이다. 한국 자동차 산업과 브랜드가 오랜 역사를 가진 유럽 브랜드와 견줄 고성능 차량을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을 입증했다는 의미가 있다.

경기 시작에 앞서 진행되는 출발 이벤트에선 각 제조사의 국기가 트랙 위에 펼쳐지는데, 이 때도 태극기가 포함돼 있었다. 제네시스는 작년에 르망 24시 LMP2 클래스에 참가했지만, 차량 제작에는 참여한 게 아니어서 태극기는 걸리지 않았었다.

르망 24시 규정상 차량 제조에 참여한 기업의 국기만 걸 수 있다. 이로 인해 제네시스는 작년 LMP2 클래스 차량 리버리에 태극기를 추가했었다.

13일(현지시각) 프랑스 르망 라 사르트 서킷 경기장에 태극기가 계양돼 있다. /제네시스 제공

제네시스 출전으로 아시아에 기반을 둔 기업은 2개로 늘어났다. 일본 도요타가 처음 르망 24시에 진출한 1985년 이후 40년 만이다. 도요타는 올해 대회에 우승하면서 르망 24시 통산 우승 기록을 6회로 늘렸다.

현장에서는 대회 기간 빨간색 바탕에 흰색 글씨로 'TOYOTA'라 적힌 깃발을 몸에 두른 유럽인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제네시스는 처음 출전했지만, 검은색 바탕에 주황색 마그마 로고가 적힌 티셔츠를 입은 이들도 종종 포착됐다.

◆제네시스, 르망 24시를 유럽 성장 발판으로

르망 24시는 모터스포츠를 넘어 글로벌 자동차 제조사들이 미래 모빌리티 기술을 시험하고 브랜드의 정체성을 각인시키는 '기술 전쟁터'다. 혹독한 환경에서 트랙을 달리며 확보된 데이터들을 양산차 개발에 즉각 활용할 수 있어서다. 브랜드 인지도 상승은 덤이다.

때문에 페라리와 포르셰, 메르세데스-벤츠, BMW 등 고성능과 프리미엄을 대표하는 브랜드들은 막대한 돈을 들여 하이퍼카, GT3 클래스에 출전할 차량을 개발하고 경기에 출전시키고 있다. 도요타와 렉서스도 두 클래스에 출전한 바 있다.

마그마 GT3 콘셉트의 외관. /김지환 기자

제네시스는 이번 대회에서 확보된 각종 데이터들을 양산차뿐만 아니라 고성능차 개발에도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현장에서 만난 제네시스 관계자는 "페라리가 지금의 페라리가 된 것도 르망 24시 경험 덕분"이라며 "제네시스는 현대차‧기아 남양연구소 등과 협업해 여러 준비를 하고 있으며, 매년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