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시장을 주름잡았던 유럽 자동차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 한 때 높은 성장세의 발판이 됐던 중국에서 판매 부진이 지속되며 실적이 악화되고 있는 것이다. 유럽 자동차 기업들은 최근 방위산업 시장에 눈을 돌리거나 중국 전기차 위탁 생산 등을 검토하며 생존을 모색하는 상황에 몰렸다.
19일 완성차 업계에 따르면 독일 폴크스바겐그룹은 올해 1분기 매출 757억유로(약 131조2250억원), 영업이익은 25억유로(4조3300억원)를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각각 2.5%, 13.8% 감소한 수치다. 순이익은 15억6000만유로(2조7000억원)로 28.4% 줄었다. 폴크스바겐은 미국 관세 인상과 중국에서의 경쟁 심화로 실적이 악화됐다고 설명했다.
메르세데스-벤츠의 1분기 매출과 영업이익도 각각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9%, 17% 감소한 316억유로(54조7700억원), 19억유로(3조2900억원)에 그쳤다.
BMW의 1분기 매출은 310억700만유로(53조7100억원)로 전년 동기 대비 8.1% 줄었다. 영업이익은 36.2% 줄어든 23억4800만유로(4조670억원)를 기록했다. BMW는 실적 관련 보고서를 통해 "중국 시장에서의 판매 부진과 미국 관세 비용 증가 등이 실적 부진의 원인이 됐다"며 "비용 절감 등의 노력으로 줄어든 매출과 이익을 만회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메르세데스-벤츠와 BMW, 폴크스바겐(아우디 포함) 등 독일 완성차 3사의 중국 시장 내 합산 판매량은 줄곧 감소하고 있다. 3사의 올해 1분기 합산 판매량은 93만5400대로 전년 동기 대비 15.1% 감소했다. 2024년과 지난해 1분기 합산 판매량은 119만5400대, 110만1300대였다.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인 미국에서도 경쟁에 밀리고 있다. 독일차 3사의 올해 1분기 미국 내 판매량은 32만3300대로 전년 동기 대비 9.3%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차·기아 등 한국 업체와 도요타를 포함한 일본 브랜드 등에 밀려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본업인 완성차 판매에서 수 년 간 부진이 이어지면서 유럽차 업체들은 수익 다각화, 구조조정 등을 통한 실적 회복 방안을 찾는데 안간힘을 쓰고 있다.
폴크스바겐은 지난달 30일 전세계에서 연간 생산 능력을 900만대(최대 생산량 1200만대)로 줄이고,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올리버 블루메 폴크스바겐 최고경영자(CEO)는 "유럽에서 중국 자동차를 생산할 기회가 있는지 확인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폴크스바겐은 중국에서 상하이자동차(SAIC)와 협업하고 있다. 블루메 CEO의 이번 발언은 SAIC의 유럽 내 위탁 생산을 검토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스텔란티스와 닛산 등도 지리자동차와 체리자동차 등 중국 업체들과 유럽 내 자사 공장 활용에 관해 논의한 바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폴크스바겐은 이스라엘 방산업체인 라파엘의 아이언돔 부품을 오스나브뤼크 공장에서 생산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폴크스바겐은 경영난을 겪고 있는 이 공장의 가동을 내년까지 단계적으로 중단할 예정인데, 새로운 활용 방안을 모색하는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르노그룹도 방산 분야에 발을 걸치며 악화된 실적을 회복하는데 힘쓰고 있다. 르노그룹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36억유로(6조2300억원)로 전년 대비 14.2% 감소했다. 이 회사는 프랑스 국방부와의 협의를 거쳐 지난 1월 "매달 최대 600대의 드론을 생산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피아트와 마세라티, 푸조, 시트로엥 등 여러 유럽 브랜드를 거느린 스텔란티스는 지난해부터 푸조 308 등 주력 모델에 디젤 트림을 추가해 생산하고 있다. 스텔란티스는 지난 2021년 '전기차 올인'을 선언하며 총 3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지만, 지난해 223억유로(약 38조원)의 순손실을 기록하자, 내연기관으로 회귀했다.
완성차 업계 관계자는 "한국과 중국 자동차의 약진 속에서 유럽 자동차 업체들은 전기차 기술 개발에서도 어려움을 겪으며 점차 쇠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유럽 회사들은 지속적인 수익 다각화 방안을 고민할 것"이라며 "다만 무기 생산 등은 수익 규모가 한정적이고 작은 만큼 일시적이 미봉책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