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해 2월 60대 남성 A씨는 휴대전화에 “중고차 매매 사기단에 속아 자동차를 강매당했다는” 내용을 적은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중고차 구매를 위해 찾아간 매매단지에서 사기단에 감금당하고, 강제 대출을 받아 200만원짜리 1t(톤) 트럭을 700만원에 구입했다. A씨 사망 후 수사를 펼친 경찰은 A씨 등 50여명에 3개월간 6억원 상당의 사기를 친 일당 4명을 구속하고, 22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2 평소 관심이 있던 국산 소형 스포츠유틸리티차(SUV)가 중고차 사이트에 470만원으로 올라온 걸 발견한 B씨는 딜러(판매자)에게 연락을 취하고, 매매상사를 방문했다. 그러나 막상 딜러는 B씨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원래 제시됐던 가격의 6배 높은 2880만원을 요구했다. 사기를 당했다고 생각한 B씨는 구매를 거부했으나, 딜러는 폭언을 내뱉고 협박했다. 또 B씨를 차 안에 감금하기도 했다.

서울 성동구 장안평중고차매매시장에 중고차 매물들이 빼곡하게 쌓여있다. /뉴스1

현대차(005380), 기아(000270), 쌍용차(KG모빌리티) 등 완성차 업계가 올 하반기부터 중고차 시장에 본격 진출한다. 그간 허위・미끼 매물로 인한 소비자 피해가 상당했던 탓에 이들 완성차 업체의 시장 진출에 대한 기대가 크다. 신뢰도 높은 대기업이 시장에 진출하면 병폐가 사라지고, 건강한 시장이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커지는 중고차 시장… 시스템은 낙후

한국자동차산업협회(KAMA)에 따르면 2020년 국내 중고차 거래량은 251만5000대로, 신차 거래량(190만5000대)보다 1.3배 많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대중교통을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났고, 구매력 양극화에 따른 수요 증가라는 게 KAMA 분석이다.

미국과 일본 등 자동차 선진 시장에서 신차 대비 중고차 시장 규모가 2배에 달한다. 이 점을 고려하면 역대 최고치이긴 하지만, 아직 국내 중고차 시장이 더 성장할 여지는 남아있다는 게 자동차 업계 설명이다.

그러나 낙후된 국내 중고차 거래 방식은 시장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 실제 2020년 매매업자를 통하지 않고 당사자가 직거래한 중고차는 전체의 54.7%(137만6000대)를 차지했다. 이에 대해 KAMA 측은 “개인 직거래 비중이 미국, 독일 등 해외(30% 수준)보다 높은 건 시장에 대한 불신이 반영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국내 중고차 시장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건 허위・미끼 매물이다. 실제로 있지도 않은 중고차를 있다고 속이거나, 온라인 사이트 등에 시세와 동떨어진 가격을 올려둬 소비자를 유인하는 것이다. 소비자는 이런 매물에 속아 불량 중고차를 구매하는 것도 억울한데, 딜러들의 폭언이나 협박, 감금까지도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A·B씨와 같은 사례가 나오기도 한다.

◇ 완성차 회사의 중고차 진출 가시화

최근 완성차 업체의 중고차 시장 진출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현대차와 기아는 최근 연 주주총회에서 인증 중고차 사업 진출을 위한 정관 변경을 가결했고, 쌍용차에서 이름을 바꾼 KG모빌리티도 중고차 사업에 집중하기로 했다.

먼저 기아는 지난 17일 사업 목적에 ‘금융상품판매대리・중개업’을 추가했다. 현대차는 23일 주총에서 동일 안건을 통과시켰다. 장재훈 현대차 대표이사 사장은 “인증중고차 사업으로 신뢰도 높은 중고차를 제공해 잔존가치를 높여 고객의 실부담액을 경감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차, 기아 등 대기업의 중고차 사업은 지난해 중소벤처기업부의 권고에 따라 오는 5월부터 가능하다. 현대차와 기아는 올 하반기 본격적인 사업을 위한 실무 작업 중이다. 현대차는 지난 1월 경기 용인시에 자동차 매매업 등록을 끝냈고, 기아는 전북 정읍시에 등록했다. 현대차는 경남 양산시에 ‘인증중고차 전용 하이테크센터’를 조성하고, 기아는 수도권 모처에 전용 시설을 구축하고 있다고 한다.

현대자동차는 23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본사에서 제55기 주주총회를 개최했다. /뉴스1

현대차와 기아는 200여개 항목의 품질 검사를 통과한 차만 선별해 판매한다는 계획이다. 모두 출고 5년, 주행거리 10만㎞ 이내의 중고차만 취급한다. 현대차는 기존 중고차 업계와의 상생을 위해 2025년까지 시장점유율을 4.1%로 제한하기로 했다. 기아는 시장점유율을 2.9%로 유지한다.

KG모빌리티도 지난 22일 주총에서 인증중고차 판매, 정비 조직, 체제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올 하반기부터 본격 사업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르노코리아와 한국지엠(지엠 한국사업장)도 각각 인증중고차 사업을 준비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 소비자 반응 “피해 줄어 환영”

중고차 업계는 대기업의 시장 진출을 우려하고 있다. 골목상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중기부도 이런 기존 업계의 우려를 고려해 대기업인 완성차 업체의 시장 진출을 1년 유예했다. 그러나 이미 국내 중고차 시장은 거래액 30조원에 달하는 거대 시장으로 평가받는다. 골목과는 거리가 있다는 얘기다.

또 중고차 업계의 우려와 달리 소비자는 대기업의 시장 진출을 반기는 분위기다. 한국소비자원이 지난해 12월 낸 ‘중고차거래앱(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만족도 조사’에 따르면 응답 소비자 대부분은 완성차 회사의 중고차 시장 진출에 대부분 찬성했다.

서울 성동구 장안평중고차매매시장에 중고차 매물들이 빼곡하게 쌓여있다. /뉴스1

보배드림, 엔카닷컴, 첫차, KB차차차, 케이카(Kcar) 등 국내 중고차 거래 상위 5개 앱 이용자 1340명을 대상으로 한 이 조사에서 응답자는 완성차 업체의 중고차 시장 진출에 대해 5점 만점에 4점을 줬다. 소비자는 “안전한 매물이 많아진다”, “선택 폭이 넓어진다”, “피해가 줄어든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소비자 단체 역시 완성차 회사의 중고차 시장 진출을 반기는 분위기다. 허위・미끼 매물에 대한 피해가 감소할 수 있고, 거래 투명화가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소비자 단체 관계자는 “적어도 (대기업은) 사기를 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것”이라며 “이것만으로도 그간 중고차 업계가 얼마나 많은 피해자를 양산해 냈는지 알 수 있다”라고 했다.

◇ 허위 매물 근절될까… “싼 차 찾는 심리 있는 한 없앨 수 없어”

완성차 업체의 중고차 시장 진출은 유통 투명화 측면에서 메기효과가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자동차 업계는 이미 고질병이 된 허위・미끼 매물이 완전 근절되긴 어렵다고 본다. 싼 차를 찾는 소비자는 항상 존재하며, 이 심리를 이용한 사기 판매도 여전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특히 중고차를 찾는 소비자의 상황이 모두 다르고, 매물 역시 다양하다는 점에서 전체 시장의 수준 향상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예측이다.

자동차산업연합회에 따르면 현대차, 기아 등이 취급하려고 하는 출고 5년・주행 10만㎞ 이내 중고차는 2026년 시장의 7.5~12.9%를 차지할 것으로 예측된다. 완성차 회사가 판매하는 중고차가 4년 뒤에도 100대 중 13대가 되지 않고, 나머지 중고차는 지금과 같은 구조로 판매된다는 얘기다.

중고차 가격의 상승도 무시하기 어렵다. 완성차 업체의 중고차는 품질 검수, 상품화 등에 적지 않은 비용이 발생하는데, 이에 따라 시장에서 거래되는 중고차보다 높은 시세가 형성된다. 이미 인증중고차 사업이 활발한 수입차 시장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업계 관계자는 “국산 인증중고차 시장이 열리면 시장에 대한 긍정적인 효과가 기대되지만, 반대로 시세 상승 등이 나타나 양극화가 발생할 수 있다”라며 “대기업 중고차가 기존 중고차 시장과 정교하게 결합할 수 있도록 시장 전략이나 제도를 짜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