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000270) 차 중에서 유럽에서 잘 팔리는 ‘스포티지’는 차 길이(전장)가 국내 및 다른 글로벌 시장에서 판매되는 모델보다 145㎜ 짧다. 국내에서 파는 모델은 전장이 4660㎜인데, 유럽형 스포티지만 4515㎜다. 휠베이스(자동차의 앞바퀴 중심과 뒷바퀴 중심 사이의 거리)도 유럽형 스포티지는 국내 모델(2755㎜)보다 75㎜ 짧은 2680㎜다.
유럽 모델 차량의 크기가 작은 이유는 유럽의 도로가 좁기 때문이다. 유럽형 스포티지는 차체가 짧은 만큼 실내·트렁크 공간이 좁은데, 소형 해치백이나 콤팩트 스포츠유틸리티차(SUV)와 같은 실용적인 차를 좋아하는 유럽에선 단점이 되지 않는다. 유럽 맞춤형인 ‘메이드 포 유럽(Made for Europe)’ 모델인 셈이다. 스포티지 하이브리드 2WD(후륜구동)의 가격은 국내에서 3163만원부터인데, 유럽은 독일 기준 3만8450유로(약 5200만원)부터 시작돼 국내보다 비싸다.
국내에 현대차(005380) 연구개발(R&D) 핵심 조직인 남양연구소가 있다면, 유럽에는 독일 뤼셀스하임에 신차 개발을 담당하는 현대차 유럽기술연구소가 있다. 현대차그룹의 유럽 전략차종인 현대차 ‘바이욘(Bayon)’, 기아 ‘씨드(Ceed)’, 제네시스 ‘G70 슈팅브레이크’를 비롯해 글로벌 시장에서 판매되는 현대차 ‘코나N’, 현대차 ‘i20N’ 등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세계에서 가장 거칠고 위험한 주행 코스로 유명한 독일 뉘르부르크링엔 자체 주행시험 센터가 있고, 체코·튀르키예·슬로바키아에 생산 공장도 있다.
◇ 최대 8년 보증으로 유럽 점유율 첫 ‘톱3′
지난해 10월 방문한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에선 현대차와 기아의 자동차가 곳곳에서 보였다. 국내에서 보기 힘든 현대차 해치백 ‘i10′와 ‘i30′, 기아 해치백 ‘씨드’를 비롯해 기아 ‘피칸토’(국내명 모닝), 현대차 전기차 ‘코나EV’, 기아 전기차 ‘니로EV’ 등 익숙한 차들도 눈에 띄었다.
유럽이 본토인 메르세데스-벤츠나 아우디·폭스바겐 차가 가장 많이 보였는데, 현대차·기아의 자동차는 도요타 등 일본차나 GM·포드 등 미국차보다는 훨씬 더 자주 보였다.
니로EV를 운전하는 덴마크 택시 회사 단택시(Dantaxi) 소속 이브라힘씨는 기아 차에 대해 엄지를 치켜들며 “싸고 좋다(Cheap and Good)”고 말했다. 그는 “덴마크엔 벤츠 택시가 많았는데, 요즘은 코나EV나 니로EV로 갈아타는 추세”라면서 “벤츠는 보증기간이 2년인 반면 기아는 7년이라 경제적이다. 승차감도 뛰어나다”고 말했다.
1999년 ‘10년, 10만 마일 보증’을 내세워 미국 시장을 공략한 현대차그룹은 유럽에서도 ‘최대 8년 보증’의 승부수로 시장에 안착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현대차는 유럽에서 5년의 보증 기간을 제공한다. 아이오닉과 코나EV는 보증 기간이 8년이다. 기아는 모든 모델을 7년간 보증한다. BMW, 폭스바겐, 벤츠, 아우디 등 다른 브랜드들은 보통 2년, 도요타 등 일본 자동차 브랜드는 보통 3년만 보증한다.
전기차 시대로 접어들며 브랜드 위상을 높인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유럽에서 처음으로 시장 점유율 3위를 기록했다. 유럽자동차공업협회(ACEA)에 따르면 올해 1~11월 현대차그룹은 총 98만6860대를 판매해 판매량을 전년 대비 4.6% 늘렸다.
해당 기간 시장 점유율은 전년 동기보다 1.0%포인트(p) 오른 9.7%로 조사됐다. 1위는 폭스바겐그룹(24.7%), 2위는 스텔란티스(20.3%), 4위는 르노그룹(9.1%)이다. 점유율 5위는 도요타그룹·BMW그룹(7.2%), 7위는 벤츠(5.7%)다.
2001년 1.5%에 불과했던 현대차그룹의 유럽 점유율은 20여년 동안 8.2%p 높아졌다. 유럽산 자동차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유럽에서 눈에 띄는 약진이다. 같은 기간 유럽에서 도요타의 점유율은 2001년 3.7%에서 2022년 7.2%로 3.5%p 오르는 데 그쳤다.
◇ 유럽서 ‘개발→생산→판매’ 현지화 전략
현대차그룹은 유럽에서 적극적인 현지화 전략을 펼치고 있다. 개발부터 생산까지 모두 유럽 내에서 이뤄진다. 2022년 상반기 기준, 유럽 판매량 전체의 70%가 유럽에서 생산된 차종이다. 독일 뤼셀스하임에 위치한 현대·기아차 유럽기술연구소가 신차를 개발하고, 뤼셀스하임 내 유럽디자인센터가 신차 디자인을 진두지휘한다. 생산은 체코(현대차), 튀르키예(현대차), 슬로바키아(기아) 등 현지 공장이 맡는다.
같은 차종이라도 유럽에서는 마일드하이브리드(MHEV) 파워트레인을 탑재한 모델이 많다. 현대차 니로·i30·바이욘·투싼, 기아 스포티지·X씨드 등이 모두 MHEV 파워트레인을 갖췄다. 니로·투싼·스포티지는 국내에 MHEV 모델이 없고, 유럽에만 있다.
하이브리드는 전기 모터만으로도 주행이 가능하지만, MHEV는 엔진으로 움직이고 모터는 보조 역할만 한다. 일반 엔진 차량보다는 연비가 좋다. 유럽에 MHEV 모델이 많은 이유는 이동 거리가 긴 유럽 소비자를 겨냥하는 동시에 엄격한 유럽의 배출가스 규제를 충족하기 위한 맞춤 전략이다.
마케팅도 성공 비결로 꼽힌다. 유럽에선 모터스포츠와 축구가 인기다. 현대차그룹은 2002년부터 월드컵을 후원하며 인지도를 높였고, 최근 몇 년간 영국 프리미어리그 ‘첼시FC’, 스페인 라리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이탈리아 세리에A ‘AS로마’, 독일 분데스리가 ‘헤르타 BSC’ 및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 파트너십 계약을 맺었다. 축구에 빠져 사는 유럽인 취향에 맞춘 마케팅으로,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는 큰 역할을 했다.
모터스포츠 분야에서도 현대차는 2012년 모터스포츠 활동을 전담하는 현대차 모터스포츠 법인을 설립하고, 고성능차 개발 조직을 별도로 설립했다. 2014년 WRC(월드랠리챔피언십) 사양으로 제작된 i20 모델로 WRC에 재참가했고, 2015년 고성능 브랜드 N을 출시했다. 2019년엔 WRC에서 첫 우승을 거머쥐었다. ‘잘 달리는 차’를 중시하는 유럽 소비자들이 현대차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됐다.
디자인과 가격도 성공 요인이다. 독일의 3대 자동차 전문지로 꼽히는 ‘아우토 모토 운트 슈포트(AMS)’는 현대차·기아가 유럽 시장에서 성공한 이유를 분석하며, “현대차·기아의 디자인은 1990년대 독일에 처음 진출했던 때보다 두드러지게 개선됐다”며 “독일 진출 초기의 현대·기아차는 ‘저렴한 차’라는 이미지가 강했지만, 지금은 합리적인 가격으로 고급 소재와 다양한 안전·친환경 기술을 제공하는 브랜드로 꼽힌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