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북미에서 생산된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주는 내용이 포함된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서명하면서 현대차(005380)기아(000270)의 전기차 전략에 비상이 걸렸다. 전기차 전량을 국내에서 생산해 수출하는 현대차와 기아는 전기차 보조금을 받지 못하면 미국 시장에서 경쟁력을 크게 잃을 수밖에 없다.

현대차와 기아는 한국자동차산업협회를 통해 미 의회에 항의 서한을 보내는 등 대응에 나섰지만, 국내 브랜드가 다시 보조금을 받으려면 상당한 외교적 노력이 요구될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그룹은 현지 전기차 생산 일정을 최대한 앞당기고 전기차 출시 일정을 조정하는 등 전략 수정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6일 백악관에서 기후변화 대응 등을 골자로 한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서명하고 있다./연합뉴스

현대차와 기아는 전용 전기차 ‘아이오닉 5′와 ‘EV6′를 미국에 출시하면서 상당한 돌풍을 일으켰다. 올해 상반기(1~6월)에는 아이오닉 5와 EV6가 각각 1만대 이상 판매되면서 미국 전기차 시장에서 테슬라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블룸버그는 “현대차그룹은 테슬라가 10년 걸린 판매 수준을 몇 달 만에 이뤘다”며 “일론 머스크에게는 미안하지만, 현대차가 조용히 전기차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현대차는 하반기에 전기 세단 ‘아이오닉 6′도 미국 시장에 투입할 계획이다.

그런데 인플레이션 감축법이 통과되면서 미국에서 현대차와 기아의 전동화 전략에 제동이 걸리게 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16일 백악관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서명했다. 해당 법안은 기후변화 대응 등을 위해 4300억달러(560조원)를 투입하는 것이 핵심인데, 전기차 보급을 확대하기 위해 일정 요건을 갖춘 차에 최대 7500달러(중고차의 경우 최대 4000달러)의 세액 공제해주는 내용이 포함됐다.

전기차 보조금을 받으려면 전기차 최종 조립이 미국·캐나다 등 북미에서 이뤄져야 하고, 전기차 배터리에 들어가는 원자재와 부품 역시 미국이나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에서 생산된 원자재를 일정 비율 이상 넣어 생산한 것이 탑재돼야 한다. 이 조건대로라면 현대차와 기아는 보조금을 받기 어렵다. 현대차와 기아가 미국에서 판매하는 전기차는 전량 국내에서 생산돼 수출된다. 보조금을 받지 못하면 소비자 가격이 인상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현대차와 기아는 당장 북미에서 전기차를 생산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보조금 공백기는 더 길어질 가능성이 크다. 현대차는 올해 말부터 앨라배마 공장에서 제네시스 ‘GV70′의 전기차 모델을 생산할 계획이지만, 핵심 차종이 아닌데다 배터리 생산에 적용되는 보조금 요건도 충족시켜야 해서 보조금을 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현대차 미국 앨라배마 공장 모습./조선비즈 DB

현대차가 미국에 새로 짓겠다고 발표한 전기차 공장은 2025년 완공 예정이다. 기아는 미국 현지에 전기차 전용 공장을 구축할 계획조차 없다. 기아는 기존 공장의 생산 라인에서 전기차도 같이 만들 수 있도록 전환한다는 계획이다.

이에 현대차와 기아는 한국자동차산업협회와 산업통상자원부 등을 통해 미국 행정부와 의회에 한국 완성차 업체의 입장을 전달하고 있다. 앞서 협회는 “한미 FTA는 국내 상품 사용을 조건으로 하는 보조금 지급을 금지하고 있고, 한국은 한미 FTA에 따라 수입산 전기차에도 똑같이 보조금을 지급해오고 있다”며 한국산 전기차에도 보조금 지급을 요구했다.

하지만 한국산 전기차가 예외를 적용받으려면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평가다. 업계 관계자는 “우리 정부가 외교 채널을 총동원해 국산 전기차도 보조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국내 완성차 업체의 전기차 경쟁력이 크게 약화되는 상황이 됐다”며 “현대차와 기아도 북미 현지에서 전기차 생산을 더 늘리는 방안을 고심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